동지(冬至)ㅅ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 춘풍(春風) 니불 아레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I will slice off an end of this long, midwinter night, Hiding it double, beneath the blanket of spring winds, That I may spread it out, should my love return.
시절 이맘때면 왠지 향수에 젖는 시조가 몇 수 절로 떠오릅니다. 동지(冬至)와 더불어 크리스마스 시즌에 다가가면, 늘 그럴듯한 즐거운[merry] 기분에 얹혀 슬며시 잦아드는 동양적 애수(哀愁). 어렴풋이 다가오는 존재의 뿌리 느낌. 막연한 그리움이 투박하고 걸죽한 막걸리처럼 우리 옛말 시조 속으로 번집니다.
시절에 맞는 노래가 시조(時調)! [‘시(詩)조’가 아님] 때맞춰 유행하는 시절가조(時節歌調)를 시조라 하지요. 물론 시(詩)의 품격과 풍미를 고루 갖춘 시조도 많거니와, 딱히 시절에 맞는 가조라 이르는 까닭은 일반 민초들도 널리 즐기라는 의미?
유교적 발상과 자연친화적 이데아[idea]가 주류를 이루지만, 나름 시가적 문장력을 갖춘 수준급(?) 기생, 특히 황진이(黃眞伊) 정도의 명기(名妓)라면 능히 지어 부르며 선비들과 수작(手作)도 가능한 게 바로 시조의 멋! 장단(長短)과 곡직(曲直)이 멋지게 어우러지는 명기의 명문장. 동지(冬至)와 성탄절이 겹치는 연말 기분. 그렇게 마감되는 시즌에 절묘하게 점철되는 황진이의 시조 또한 시절의 풍류(風流)에 걸맞으니 어쩌랴.
동지(冬至)란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날. ‘윈터 쏠스티스’[Winter Solstice]라 말하지요. 밤이 가장 기니 낮은 가장 짧고, 그렇게 음기(陰氣)가 충만하니 황진이의 ‘동지(冬至)ㅅ달 기나긴 밤’이 썩 잘 어울리게 들립니다. 성탄절을 동지에 맞춰 즐기는(?) 건 전혀 사실무근의 인위적 발상! 학자들의 엄밀한 고증에 의하면 예수님 나신 날은 가을 중추 9월 23일 전후라네요. 음기 충만해 곧 양기(陽氣)가 부활하는 시절, 태양신을 숭배하는 고대의 이방 신앙이 기독교에 슬쩍 묻어 들어온 결과, 동지 무렵 12월 25일 크리스마스, “그래서 마셔!”가 되었더라?
어쨌거나, 은유와 의태가 넘치고 생생한 부사의 나열로 시조 전체가 탱탱하게 살아 움직이는 연모가(戀慕歌)의 극치 "동짓달 기나긴 밤을!" Winter Solstice에 길게 읊조림은 동지섣달 연말연시에 지극히 합당한 낭만(浪漫)의 소치.
동지(冬至)ㅅ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 춘풍(春風) 니불 아레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I will slice off an end of this long, midwinter night, Hiding it double, beneath the blanket of spring winds, That I may spread it out, should my love return.
[어느 풀이]: 동짓달 긴긴 밤의 한가운데를 베어 내어 / 봄바람처럼 따뜻한 이불 아래에 서리서리 넣어 두었다가 / 정든 임이 오신 밤이면 굽이굽이 펼쳐 내어 그 밤이 더디 새게 이으리라. "동지(冬至)ㅅ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
춘풍(春風) 니불 아레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너르고 아름답고 미쁜 우리말, 예나 지금이나 언어미학의 대향연!
'어론님'은 정을 통한 연인. 깊이 ‘알게’ 된 걸 우리 옛말론 '얼다'라고 했답니다. 그렇게 사뿐한 한마디로 연모의 심사를 가뿐히 전하는 시인 황진이. 기나긴 밤을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 밤엔 길게 '구뷔구뷔' 펴리라. 이렇게 고혹적인 우리 옛말, 과연 영어로 될까요? 흉내조차 언감생심!
동지에 때맞춰 딱히 시조(時調)를 읊는 속내는? 이맘때면 늘 뉴에이지 레이블 ‘윈담 힐’[Windham Hill] 클래식, “A Winter’s Solstice”를 들으며 지독스레 추운 미시간 유학시절을 회상하며 기나긴 동짓달 추억들을 되새겨보곤 하는데, 올핸 문득 떠오르는 시상(詩想) 하나에 그만 덜컥~! 명월 기운에 나꾸이고 맙니다.
“동짓밤 달빛아래 거나한 서생이여 / 흐르는 달소리가 저리도 여여하니 / 명월이(明月伊) 옷고름 사이로 쉬어간들 어떠리.” 긴긴밤 동지를 맞아, 청풍명월(淸風明月)에 흠뻑 젖어, 시조창 길~게 읊조리며 시조 한 수(首) 짓는 흉내를 내봅니다. 물론, 명월 황진이 시조의 애타는 표절에 다름 아닙니다. Shal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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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화 [커뮤니케이션 학 박사/영어서원 백운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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