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 성당. 세계 4대 성당중 하나로 돔에 사용된 금만 400kg이라고 한다.
-러시아의 유머
7년 만에 다시 찾는 러시아다. 7년 전에는 모스크바 공항으로 입국하였는데 그놈의 공산당의 관료주의 잔재라고 할까, 나의 인내심을 테스트 하려는지 참으로 시간을 질질 끌며 입국했던 기억도 새로운데 이번에는 놀랍게도 유럽 어느 나라 입국보다도 빠르게 처리해주어 놀랍기도 하고 기분도 좋았다.
이번 여행은 세인트 피터스버그(러시아 발음 쌍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까지 가는 리버 크루즈인데 세인트 피터스버그에서 먼저 배를 호텔처럼 쓰면서 2일간 세인트 피터스버그를 관광하는 것으로 일정이 시작되었다. 공항에서 크루즈 가이드가 비행장까지 나와서 우리 일행 5 명을 맞이하여 배로 데리고 갔는데 버스 창문으로 내다본 거리 풍경은 7년 전의 거리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7년 전에 러시아에 왔을 때에 이런 유머가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누군가 웃음을 지었다. 사람들은 그는 미친놈이거나 미국 놈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러시아 사람들 대부분이 미친놈이라고 이야기 해야겠다. 모두 화려한 색의 옷을 입은 사람도 많이 눈에 띠고 또 미소를 짓거나 최소한 밝은 표정의 모습이다. 참으로 많이 변했다고 재삼 느꼈다.
성 니콜라이 성당(흰 타르 성당).
-니콜라이 성당
이번에 승선한 배는 러시아 국적의 배이다. 그리고 러시아 가이드가 전 일정을 가이드해 주었는데 우선 가이드라는 직업이 현재 러시아 수입 수준으로 높은 것인지 꽤나 다방면으로 준비된 지적 또 교육 수준이 높은 가이드였고, 직업의식도 높다고 점수를 줄만 하였다.
그리고 7년 전에는 한국인의 눈으로 헤르미타지 박물관, 작가 푸시킨,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음악인 차이코프스키, 그리고 발레에 주안점을 두었다고 한다면 이번에는 러시아인들로 러시아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그리고 자기 나라 사랑과 프라이드를 지닌 가이드들이 가이드를 하는 바람에 역사 유적, 많은 사건을 지닌 성당들, 그리고 러시아 제국 황제들의 묘를 지닌 성 바울 성당 등 역사적인 관심들이 추가 되었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이 니콜라이 성당(때로는 하얀색 타르(Tar)가 이 지역에서 많이 생산 되는데 이 타르를 이용하여 성당을 지어 Smolny cathedral이란 이름을 가지고도 있다) 색이 매우 밝고 화려하다. 동방정교회의 제단을 보면 왼쪽이 마리아 오른쪽이 예수 상이다. 그리고 그 옆에 그림으로 성당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이곳은 성자 니콜라이 그림이 붙어 있다. 그래서 니콜라이 성당이라고 부른다.
피 흘린 성당(알렉산더 1세가 암살당한 곳).
-러시아혁명의 새벽을 알리는 성당
다음 인상적으로 본 성당이 피 흘린 성당(Spilled blood cathedral)이었다. 그 유래를 설명하자면 나폴레옹을 물리친 알렉산더 1세의 젊은 장교들이 파리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파리에서 새로운 세대의 물결을 몸소 보았다. 특히 그들이 조국의 농노제도의 불합리한 것을 보고 서서히 농노들의 해방운동이 시작하였다.
이 세대의 물결을 알렉산더 2세가 이를 받아들이자 그는 기득권을 쥐고 있는 귀족들의 손에 죽는다. 그가 피를 흘린 곳에 러시아 대중들이 추모하며 지은 것이 이 성당이다. 모양이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있는 바실리 성당과 매우 비슷하다. 러시아 혁명의 새벽을 알리는 성당이라 해야 할 것 같다.
이어서 이삭(Isac) 성당을 찾았다. 70년(1856-1908)에 걸쳐 완성된 성당으로 그 규모가 세계 4대 성당 중에 하나라고 한다. 성당 앞 정원이 잘 꾸며 있는 가운데에 니콜라이 1세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돔(Dome)에만 금이 400킬로 들였다고 할 만큼 초호화 성당이다. 그 낭비가 자기 아들 니콜라이 2세가 공산 혁명으로 몰살당하는 하나의 원인일 수도 있다는 미래의 비극을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당 순례보다 성 바울 성당 방문이 더 깊은 기억이 남는다. 이곳에는 로마노프 왕가의 번영을 불러온 그리고 세인트 피터스버그 도시를 건설한 피터 대제(표트르 대제) 와 그의 딸 엘리자베스 공주, 나폴레옹을 물리친 알렉산더 1세, 그리고 공산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가의 최후 황제인 니콜라이 2세 가족들의 관들이 보관되어 있다. 사실 이 니콜라이 2세 가족은 그의 사후 80년이 지나서 다시 말해서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고 옐친이 러시아 대통령이 된 후에야 그 가족이 몰살당한 곳에서 유골을 찾아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캐서린 여제의 슬픈 진열품들
엘바 강, 화려함에 넋이 나가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를 잊어버린다는 네프스키 대로 등의 번영 그리고 과거의 문학, 예술의 거리를 버스 안에서 구경하면서 오후에는 헤르미타지 박물관 다시 찾았다. 파리나 런던에 있는 박물관들은 그 나라가 무력으로 남의 나라에서 찬탈해온 유품들이 주를 이룬다면 헤르미타지 박물관은 캐서린 여제 때에 대부분 돈으로 사온 것들이다. 깨끗한 진열품일까? 아니다. 농노들의 피와 땀으로 모은 돈으로 사온 것이다. 어찌 보면 더 슬픈 사연의 진열품일 것이다. 7년 만에 다시 보아도 역시 진열품들에 입이 벌어진다.
사실 이 미술 박물관은 1764년 캐서린 여제가 베를린에서 223개의 미술품을 사들인 것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후 1774년에는 2,000점을 사들이고, 나중에 알렉산더 1세는 나폴레옹의 조세핀의 소장품도 사들이고, 니콜라이 1세 다빈치, 마돈나 작품 등을 꾸준히 사들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7년 전에 왔을 때 내가 못 보고 그냥 지나쳤는지 아니면 진열품이 순환되는지 잘 모르겠으나 아마도 미켈란젤로 작품 등 새로운 진열이 된 것 같다. 그리고 탐방 중 다행히도 지하 1 층에서는 이집트에서 특별 전시회가 열려 흥미로운 여러 유품을 즐기기도 했다.
저녁 식사 후에는 발레 관람을 빼어놓을 수가 없어 크루즈 사무실에서 사무실 여자의 도움을 받아 거의 20분이나 걸려 세인트 피터스버그 고전 발레 극장에서 발레 공연을 찾아 예매를 하려는데 어찌 된 것인지 미국 크레딧 카드가 전부 거부(decline) 되었다. 하는 수 없어 꿩 대신 닭이라도 하면서 여행사가 주관하는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 발레를 보았는데 나의 눈높이가 높아진 것인지 수준이 별로였다. 본전 생각이 났다면 내가 너무 건방진 마음의 밤이었나?
왼쪽 대리석 묘가 나폴레옹을 물리친 알렉산더 1세(왼쪽). 오른쪽이 피터 대제, 가운데가 왕비, 왼쪽이 딸 엘리자베스 공주(가운데). 헤르미타지 박물관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웅크린 소년’이란 조각상.
-여름 궁전
이틀째 날이다. 오늘 일정은 크루즈가 오후에 떠나기로 되어 있어 오전에 피터의 집 (Peterhop)으로 소위 별도의 돈을 내고 방문하였다. 그런데 이 피터의 집이란 것이 7년 전 왔을 때에 우리가 보통으로 부르는 여름궁전 같았는데 선머슴이 생사람 잡는다고 같은 크루즈에 탑승한 한국 부부가 첫 만남에서 ‘나만큼 여행 한 사람 없다’고 하면서 피터호프는 여름궁전과 다르다며 나를 말끔히 쳐다보면서 그것도 모르느냐 하는 태도라 얼떨결에 돈까지 지불하고 버스를 타고 가까이 가보니 바로 여름궁전이 아닌가? 화도 나고 또 어처구니없는 착각에 실소도 금치 못했다.
그러나 7년 전에 이곳을 왔을 때에는 여름궁전 내부는 구경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방문이 가능했고, 또 이번에는 그래도 러시아 가이드라 7년 전 방문 때 보다 좀 더 역사적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함으로 위안을 삼았다. 본래 이곳은 피터 대제 시절 러시아와 스웨덴이 패권 다툼을 하고 있을 때에 러시아는 두 개의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하나가 세인트 피터스버그에 방어진지와 코트린(Kotlin) 섬 방어진지이었다. 피터 대제는 이 두 진지까지 하루거리 가운데에 병영을 설치하고 두 곳을 지휘하였고 스웨덴과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이곳에 궁을 지었다. 이 궁을 짓는다는 소문을 듣고 프랑스 루이 14세가 피터 대제를 특별 초청을 하여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을 보여 주었고 그래서 그가 베르사유 궁을 모델로 해서 지은 것으로 처음에는 방 14개의 작은 규모이었으나 그의 딸 엘리자베스 공주가 80개의 방으로 확장했고, 그리고 그 후 캐서린 여제가 호화판으로 궁을 꾸며서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궁전의 내부를 돌아 다녔지만 한마디로 아무런 흥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모든 방을 금으로 지었다고나 할까? 그런대로 기억에 남는 것은 아마도 캐서린 여제도 금으로 된 방이 아니라 그래도 잠만은 좀 차분한 분위기에서 자기를 원했는지 그녀의 침실은 도금이나 금이 없이 단순한 침실이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엄청난 그리고 화려하고 온갖 분수로 만들어진 여름궁전 정원을 거닐다가 배로 돌아 왔다. 이제 리버 크루즈가 시작 되니 말이다.
-스탈린의 추억
본래 러시아의 역사란 것은 바이킹족이 발틱 해를 건너와 지금 세인트 피터스버그의 네바 강으로부터 강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 볼가 강 줄기를 타고 모스크바 지역을 지나 지금의 키예프 지역을 거쳐 종착지이자 목적지인 성스러운 도시 콘스탄티노플(동로마제국), 다시 말해서 지금의 이스탄불까지의 길을 따라 이루어진 역사이다. 러시아란 이름도 이 바이킹 족이 세운 부족국가(?)중에서 키예프의 살던 종족을 루시(Russi)라고 부른 것이 기원이다. 사실 당시에는 넓은 이 러시아 땅 이곳저곳의 슬라브(Slav) 족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을 뿐이었다.
우리의 리버 크루즈는 바로 이 네바 강으로부터 여러 호수와 강 지류를 거쳐 볼가 강으로 들어가 모스크바까지 가는 코스이다. 이 크루즈의 항해 지도를 보면 씁쓸한 기분이 든다. 이오시프 스탈린(요셉 스탈린)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인 나는 90일간 북한 치하 서울에서, 매일 이곳저곳에 김일성과 나란히 걸려있는 스탈린의 초상화를 보아야 했다. 그가 누구인지 잘 모르면서 무서운 존재라고만 알았다.
-피의 숙청과 운하
나이가 들어서 알고 보니 바로 그가 러시아에서 빠른 공산화, 공업화, 애국주의, 집단농장, 2 차 세계대전 승리 등 여러 역사의 주역이었고 또 사실 그의 피의 숙청, 정적 제거는 정말 끔직스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정치적인 숙청 작업 중 강제 노역으로 여러 사업을 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내가 항해할 세인트 피터스버그에서 모스크바까지 운하를 만든 것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크고, 그리고 다음으로 번째로 큰 라도가 호수, 오메가 호수가 있어 풍부한 물이 있었다 해도 18개의 갑문 설치는 정말 인간의 고된 노역이었는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리버 크루즈 갑판에서 강 양편에 자작나무 숲속을 지나기도 하고 또 가끔 동방성교의 양파모양 지붕을 보기도 하고, 이제 생활수준이 나아졌는지 빌라들이 보이기도 한가롭고 평화스러운 모습을 보다가 저녁을 먹었다. 자유 경쟁시장 맛을 아는지 음식의 맛이나 서브하는 사람들의 친절과 정성이 아주 좋았다. 그리고 저녁 후 음악이 연주가 있었는데 보통 다른 나라의 크루즈와는 전혀 분위기가 달랐다. 왜냐고? 클래식 음악으로 베토벤과 모차르트 작곡들을 피아노로 연주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음악 연주는 러시아만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즐겼다. 내 나이 때문이었나?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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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묵<문인, 맥클린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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