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티아고 가는 길5 (Camino de Santiago)
▶ Day 22 ~ Day 28 (레이곤 데 암브로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지금까지 총거리: 496마일(793km)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서 500마일 순례를 마친 후(대성당은 공사중).
마음마저 잃은 채 걷고, 나마저 잊은 채 걷고… 산다는 것도 이런게 아닐까
◇Day 22 ~23 (레이고 데 암브로스~ 피에로스)
-18살, 엄마의 상실
오늘은 엄마 생신이다. 살아계셨다면 희수(喜壽, 77세). 한국문화는 떠난 사람의 생일 대신 기일을 기억하기에 오랫동안 잊혀진 생일이다. 엄마와 함께 산 세월이 18년, 부재가 31년. 이젠 희미한 기억 속에 그리움도 퇴색된 세월이다. 한국의 교육정책을 비난할 맘은 없지만, 고등학교 야간 자율학습 후 밤 10시쯤 집에 들렀다 다시 도서관 갔다 자정쯤 담을 넘어 집에 들어가곤 했으니 함께 한 시간이 얼마나 됐을까?
18살 엄마의 상실은 필요를 채워주던 보호자를 잃은 이기적인 슬픔이었고, 내가 엄마가 된 후에는 14살, 17살, 18살의 자식들을 두고 떠난 한 여인을 향한 연민이었고, 애들이 다 떠난 지금은 굵고 짧은 46년의 인생을 당당하고 열심히 살아낸 멋진 한 사람으로 다가온다.
아침 7시, 아직 어두운 도로변을 걸으며 엄마와 함께한 추억들을 떠올리다 보니 기억은 산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흘러 살면서 만났던 사람들, 떠나간 사람들, 아름답고 안타깝던 만남과 사랑 등이 마음에 물안개처럼 피어난다.
-달팽이와 꽃게
어제 열심히 오른 산을 추억의 음악을 배경삼아 구비 구비 내려오니 마음은 어느새 사춘기 소녀가 되어 상념에 잠기며 인생과 사랑의 무상함으로 마음에 회색슬픔이 내려앉는다.
도심 가까이 오니 길가에 핀 이름 모를 들꽃들과 줄기마다 매달린 달팽이들이 하도 예뻐 그 모습에 푹 빠져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으며 몰입하다보니 언제 우울했냐는 듯 마음에 밝은 햇살이 번져간다.
문득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가 자살하려고 찾아갔던 아오모리 해변 백사장에서, 작은 게들이 기어가는 모습을 보다가 자살할 마음을 잊고 돌아와서 쓴 시가 생각난다. 오늘은 내게 달팽이가 꽃게로 다가온 날이다.
동해 바다의 자그만 갯바위 섬 하얀 백사장
나는 눈물에 젖어 게와 벗하고 있네
모래 언덕의 모래에 배를 깔고
첫사랑 아픔
수평선 저 멀리 아련히 떠올리는 날
촉촉이 흐른
눈물을 받아 마신 해변의 모래
눈물은 이다지도 무거운 것이
땅끝 바닷가의 십자가(위). 산티아고 입성 전 마지막 밤. 사고 이후 4일 동안은 개인 방에서 묵었는데 막상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코고는 소리와 발 냄새 풍기는 침낭 속이 그리워 도미토리에 들었다. 매일 밤 침낭에 들어갈 때마다 누에고치가 되는 기분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 있을까란 꿈을 꾸면서…. <인생수업> 저자 Dr. 퀴블로의 장례식에서 흰 봉투를 나눠주었는데 그걸 함께 여니 수백 마리의 나비가 날아올랐다는 스토리가 생각나곤 했었다. 그것도 이제 오늘이 마지막 밤. 가끔 엄마 자궁 속 같던 침낭 속이 그리울 것 같다(왼쪽 아래). 땅끝(0.00km)인 피니스테레 바닷가. 어떤 순례자들은 순례를 마친 옷, 배낭, 신발 등을 태우는 의식을 갖는다.
-뭘 위해 걷지?
다음날 아침은 8시쯤 배낭을 메고 숙소를 나섰다. 먹고 자고 걷기만 하면 되는데도 배낭의 무게가 느껴질 땐 여전히 힘들다. ‘뭘 위해 걷고 있지?’란 질문이 오늘 아침 머리를 스친다. 며칠만에 이메일을 열어보니 멘토 같은 지인의 격려. ‘걷고 또 걸으면 그 자체가 의미가 되어 길 끝에 뭐가 있든 중요치 않게 되는 경험, 나도 있었지. 거창한 목적을 달지 않아도 천천히 곱씹으며 걷고, 그렇게 걷다가 마음마저 잃은 채 걷고, 그렇게 걷다가 나마저 잊은 채 걷고…’ 산다는 것도 이런 게 아닐까? 뭘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천천히 곱씹으며 하루씩 살다보면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
◇Day 24~25 (폼프리아 ~ 발바델로)
-자만은 수치심을 키운다
아침에 눈을 뜨니 어제 오후에 다친 왼쪽 눈이 많이 부어, 어린 시절 갖고 놀던 고장 난 인형처럼 눈꺼풀이 제멋대로 내려앉는다. 그러다 보니 원근과 좌우 초점이 안 맞아 고개를 떨구고 발만 뚫어져라 보며 걸어야했다.
문득 극심한 불안증과 공황장애로 1년 넘게 만나던 내담자가 생각난다. ‘선생님, 내 옆에 앉은 동료의 머리 스타일이 바뀐 게 이제 눈에 들어와요.’ 우리도 살면서 한번쯤 있지 않을까? 땅만 보고 죽어라 걷기만 했던 기억들. 그렇게라도 걷기를 멈추지 않으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착할 테니까.
오늘은 어제 길가 기둥에서 본, 내 마음의 정곡을 찌른 ‘Pride feeds shame (자만은 수치심을 키운다)’를 곱씹으며 걸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500마일’은 보통 프랑스 생잔부터를 말한다. 그러나 시간이 많지 않은 이들은 레온이나 순례자 증서를 받을 수 있는 100km쯤에서 시작한다.
-눈과 마음을 열면
어제 묵은 알베르게에서 레온에서 출발해서 4-5일 된 순례자 서너 명을 만났다. 그들은 아직 깔끔한 모습과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카미노의 경험을 장황히 늘어놓는 걸 들으며 속으로 스치던 생각. ‘난 벌써 3주 넘게 350마일을 걸었는데… 매일 거의 20마일씩. 배낭 한번 안 보내고 차로 건너뛴 적도 없이.’
한참 걷는데 문득 아침에 스친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여기까지 와서 뭘 비교하고 경쟁하고 있지? 도대체 누구와? 왜?’ ‘난 여느 한국 사람들처럼 배낭 한번 안 보내고 차 한번 안 타고 500마일을 4주에 마쳤다’는 자랑을 쌓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도 창피하다 못해 측은했다.
그런 깨달음으로 걷고 있는데 기둥에서 발견한 ‘Pride feeds shame’. 내가 눈과 마음을 열면 온 세상은 내게 지혜와 교훈을 가르치는 열린 학교며 깨달음의 장이다. 그래서 사고 다음날인 오늘은 처음 배낭을 보내고 여유 있게 동네 산책을 하고 1시쯤 떠나 8마일만 걸었다. 자랑할 것을 하나씩 깨뜨리고 무너뜨리는 일을 카미노에서 배운다.
휠체어 페달을 손으로 돌리며 걸은 순례자. 작년에 125명의 순례자가 휠체어로 순례를 마쳤다.
◇Day 25~27 (발바델로 ~ 아르수아)
-넘어져 얼굴 다쳐
원래 걷던 대로 18-20마일씩 걸으면 무리 없이 도착 예정이었으나, 어디 사람 일이 늘 계획대로 되던가. 그저께 넘어져 얼굴을 다친 사고로 많지 걷지 못해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그러나 그를 통해 배운 깨달음을 감사히 여기고 어제부터 배낭을 다음 알베르게로 보내기 시작했다. 고행이 목적이 아니고 필요할 때면 언제든 줄이고 가볍게 걸을 수 있는데 무슨 순례자의 상징인 냥 ‘죽으면 죽으리라’는 고집으로 끌고 다녔는지. 가벼운 가방 하나 메고 걸으니 20마일이 예전처럼 힘들게 느껴지지 않아서 깊은 산골 마을의 고즈넉한 풍경을 즐기며 내려왔다. 집에 돌아가서도 ‘가끔씩 버겁게 짓누르는 삶의 배낭 내려놓기’란 큰 숙제를 안고 떠난다.
오후 5시쯤, 아직 5마일 남은 길을 열심히 걷는데 거꾸로 오던 한 순례자를 만났다. 산티아고를 갔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30대 후반의 미국인. ‘넌 한국사람?’ ‘응. 버지니아 사는 한국계 미국인이야. 네 이름은?’ ‘원래 Sky인데 별명은 거북이. 근데 왼쪽 눈이 왜 그래?’하고 묻는다.
갈 길은 먼데 말을 시작하면 길어질 거 같고, 도인 같은 그의 삶이 궁금하기도 하고. 순간 고민하다가 오랜만에 만난 영어가 통하는 순례자와의 나눔을 택했다. 다시는 만나지 않을 익명의 사람이 주는 비밀보장의 안전함이랄까? ‘임금님 귀는 당나귀’에 나오는 항아리처럼, 힘들던 직장과 가정사, 며칠 전 사고와 기적, 그리고 어제 아침 100km 지점부터 느꼈던 벅찬 감동과 감사를 나누었다.
-길에서 만난 순례자
정원사이며 미술가인 그는 7년 전, 나처럼 생일날 첫 카미노를 걷고 갈등과 회의가 느껴지던 직장을 그만두고 모든 살림을 창고에 넣고 최소한의 짐으로 세상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단다. 돈이 필요하면 외국 농장에서 일하며 돈을 벌고 주위를 여행하고… ‘가진 게 없으니 마음이 자유롭다’는 그의 얼굴에 맑은 미소가 번진다. 이 길에는 무소유의 도인과 기인들을 가끔 만난다. 물론 그들처럼 살 수는 없을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무소유의 자유함’과 ‘미니멀리즘’을 조금씩 배워갈 수 있어 감사하다.
‘너는 이미 산티아고에 도착했네. 정작 산티아고 가면 실망할거야. 관광객들로 인산인해. 너무 상업적으로 변했어. 이미 그런 깨달을 경험했다면 설사 여기서 그냥 집으로 돌아간다 해도 넌 이미 산티아고에 간 거나 진배없어.’
어제와 오늘, 그의 말이 계속 귀에서 울린다. ‘넌 이미 산티아고에 도착한 거야.’
맞다. 내가 한달동안 바라보고 걸은 곳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대성당이나 ‘산티아고’라는 스페인 북서쪽 도시가 아니지. 어제 아침 걸으면서 눈물과 함께 벅차게 다가오던 감사와 은혜 (Gratitude & Grace). 거기가 이미 내게 ‘산티아고’였음을 길에서 우연히 만난 순례자에게 배웠다.
한 시간 넘는 수다를 마치고 2마일을 더 걷다보니 저녁 7시. 남은 3마일은 자유로운 마음으로 택시를 탔다. 그리고 다음날도 14마일을 걸은 후 9마일을 차로 이동. 필요하면 배낭도 보내고 너무 힘들면 차타고 건너뛰기도 하면서… 훈장도 자랑할 것도 없어진 “난 자유롭고 행복한 날라리 순례자.”
100km 이상 걷는 순례자에게 주는 순례자 증서(그동안 알베르게나 성당에서 도장 받은 순례자 여권을 보여줘야 한다.횐쪽). 산티아고 대성당의 순례자 미사.
◇Day 28 (마지막 날: 아르수아 산티아고
(Santiago de Compostela)
-산티아고에 도착하다
순례 마지막 날, 그래도 명색이 순례자인데 산티아고 입성 날이니 배낭을 메고 떠났다. 4일 내려놓았다가 다시 짊어지니 그렇게 무겁게 어깨를 누르던 배낭이 감당할만했다. ‘삶의 배낭도 가끔 내려놨다가 다시 짊어지면 되는구나.’ 10마일을 걷고 차로 10마일 이동 후 산티아고가 내려 보이는 고자(Goza) 언덕에 도착했다.
이제 4마일만 더 걸으면 산티아고 도착. 언덕 위 십자가 앞에 북적거리는 백여 명의 인파를 피해 작은 성당에 들어가니 작은 성당 안에는 한두 명의 순례자만이 있었다. 무릎을 꿇고 앉으니 지난 순례길이 필름처럼 지나간다.
피레네를 넘던 첫날. 종일 내리던 비폭풍이 생일날의 카미노 첫날을 축복하더니, 마지막 날에도 내가 좋아하는 비가 선물처럼 내린다. 첫날 비 폭풍은 익숙한 일상을 떠나온 갱년기 아줌마의 마음처럼 내리더니, 오늘은 분무기로 뿌리듯 촉촉한 보슬비가 내 마음에 단비로 내린다.
-대성당의 미사
다음날 매일 열리는 12시 순례자 미사에 참석했는데 전 세계에서 온 몇천 명이 함께 드리는 산티아고 대성당 미사는 감동 그 자체였다. 미사를 마친 후 차를 타고 50마일 떨어진 땅끝(0.00km), 야고보 사도가 배를 타고 선교 왔던 ‘피니스테레’를 다녀오는 걸로 한달 간의 모든 순례 일정이 끝났다.
지난 28일 동안 나는 길 위에서 만난 크고 작은 깨달음의 보석들을 배낭에 주워 담았다. ‘단정한 모범생’으로 덮어쓴 금칠을 4주 동안 매일 ‘빼빠’로 다듬다보니, 속에 숨어있던 원목의 소탈하고 자연스러운 나의 다양한 모습 -폭발하는 호기심, 충만한 모험심과 도전 정신, 작렬하는 감수성, 삶의 의미를 찾는 구도자, 자연 속에서 행복 만땅인 길꾼- 을 만났다. 나의 나됨이 감사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카미노를 한 번도 안 걸은 사람은 있지만 한번만 걸은 사람은 없다.’
2년마다 카미노에 오른 네덜란드 순례자처럼 나도 2년 후 포르투갈 길을 걷는 꿈을 안고 떠난다. 상담사의 힐링 작업이 상담방 뿐 아니라 엄마 같은 자연(mother nature) 속에도 있음을 배웠기에 그때는 이 길을 걷고 싶지만 혼자는 용기가 없는 지인들과 함께 오고 싶다. ‘길 위의 힐링 여행’이란 새 꿈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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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모니카 이(페어팩스,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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