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티아고 가는 길3 (Camino de Santiago)
▶ Day 8 ~ Day 14 (나바레테~카리온 데로스 콘데스) 지금까지 총거리: 248마일(397km)
애리조나 같은 황량한 벌판이 며칠 동안 이어졌다. 16년 전 처음 산티아고를 걷기 시작한 후 다른 루트와 계절에 8번째 카미노를 걷는다는 네덜란드 순례자.(작은 사진 위) 척박한 산위에 순례 길에도 십자가는 우뚝 서있다(작은 사진 아래).
자주 멈춰 서서 눈을 감고
팔을 양옆으로 벌리고 바람을 느껴본다.
음악처럼 들려오던 바람소리에 나의 오감이 활짝 열린다.
바람 냄새, 눈을 가득 채운 푸른 하늘과 흰 구름과 황금색 평야,
온 몸과 얼굴을 감싸는 바람의 어루만짐.
온 몸과 마음과 영혼의 모세혈관까지 잔잔한 평화가 스며든다.
……………………
작은 속삭임이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진다.
#Day 8 ~ 9 (나베레테 ~ 비야마요르)
-이히 리베 디히를 합창하다
순례 길에 오른 지 일주일이 지나니 나름의 하루 일과가 생긴다. 일반적으로 아침 5-6시쯤 기상해서 아침 6-7시쯤 떠나 12-15마일을 걷고 1-2시쯤 알베르게에 들어가 짐을 풀고 오후에는 쉬거나 동네 구경을 하는데, 난 7시쯤 일어나 짐 싸고 아침 먹고 거의 마지막 주자로 떠난다.
오전에 약 4시간을 걷고 점심은 식당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한 후 1-2시간 쉬며 동네를 돌아보고 2-3시쯤 다시 출발해서 오후에 3-4시간을 더 걷는다. 9월 뙤약볕의 더운 날씨에 걷는 게 녹녹치 않아 오후에 걷는 순례자는 많지 않아서 나는 찬물 적신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모자를 쓰고 혼자만의 고즈넉한 시간을 즐긴다. 6년 동안 40도 방에서 훈련된 핫 요가 덕을 톡톡히 봤다. 다행히 몇 개의 알베르게가 예약을 받아서 6-7시까지 여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그날 저녁엔 시골의 작은 알베르게에 모여 십여 명이 함께 식사를 하던 중에 버지니아의 West Springfield 고등학교를 졸업한 60대의 자매를 만나 무척 반가웠다. 옆에 독일인 순례자 5명이 앉아서 인사를 나누고 “내가 아는 유일한 독일어는 고등학교 음악시험 때 외워서 부른 ‘Ich liebe dich(이히 리베 디히 - 그대를 사랑해)’라고 말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니 모든 독일이니 따라 불러서 합창이 되었다. 음악은 사람 사이의 경계를 풀고 마음을 여는 힘이 있다는 걸 새삼 경험했다.
-넌 여전히 소중해
다음날 아침 길을 나서는데 아침 공기가 제법 쌀쌀해졌다. 오늘 지난 길에는 포도밭도 무화과나무도 없는 넓고 광활한 평야를 온 종일 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푸른 하늘 아래 황금 밀밭과 초록빛 나무와 갈색 대지, 수채화 같은 풍경에 바람소리가 더해지니 영화 속을 걷는 느낌이다. 자주 멈춰 서서 눈을 감고 팔을 양옆으로 벌리고 바람을 느껴본다. 음악처럼 들려오던 바람소리에 나의 오감이 활짝 열린다. 바람 냄새, 눈을 가득 채운 푸른 하늘과 흰 구름과 황금색 평야, 온 몸과 얼굴을 감싸는 바람의 어루만짐. 온 몸과 마음과 영혼의 모세혈관까지 잔잔한 평화가 스며든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넌 여전히 소중해!’라는 속삭임이 가슴 깊은 속에서 울려 퍼진다. 나의 나됨이 감사한 하루였다.
#Day 10 ~ 11 (비야마요르 ~ 부르고스)
-나도 걷고싶다
열흘이 되서야 오래 꿈꾸던 산티아고 길을 걷는 내 모습이 ‘here & now’의 현실로 느껴지며 행복함이 밀려온다. 페이스북에 매일의 저널과 사진을 남기지 않았다면 아스라한 가을날 한낮의 꿈으로 기억되었으리라.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산티아고가 자신의 버켓 리스트라고 말한다. 이 글이 생생한 경험과 팁을 나누는 정보의 장이 되고, 그 길을 알지 못했던 이들에게는 ‘언젠가 나도 걷고 싶다’는 꿈을 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배낭 하나 짊어지고 한 달 넘게 혼자 걷는 일은 살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경험임을 10일의 짧은 경험으로도 감히 말할 수 있다.
오늘은 제일 많이(21마일) 걸은 날이다. 보통 아침에 여행 책자를 보며 오늘 걸을 길의 거리와 루트를 확인하고 다음 알베르게를 예약한다. 오늘은 12마일 이후에 9마일 더 가야 숙소가 있어서 둘 중 얼마를 걸을지 선택해야했고 난 후자를 택했다. 내일 머물게 될 부르고스는 인구 20만이 넘는 큰 도시고 유명한 성당이 있어서 내일은 15 마일만 걷고 오후에는 성당과 박물관 등을 구경하며 여유 있는 저녁 휴식을 취하려 한다.
같은 배낭, 같은 셔츠와 바지. 노부부의 뒷모습이 정겹다.
-각국 동물소리 경연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했던가? 아침부터 오래 걸을 작정으로 걸으니 덜 지쳤다.
점심도 간단히 먹고 가게에 들러 과일과 스낵과 생선 통조림까지 만반의 준비를 했다. 음식을 짊어지고 걷는 것은 무거워진 배낭의 무게를 감수하는 것이다. ‘모든 게 맘먹기 달렸다’더니 어제는 16마일을 걷고 완전 지쳤는데, 오늘은 21마일을 걷고도 비슷한 시간에 꽤 쌩쌩한 모습으로 도착했다.
저녁 식사 시간에 스웨덴, 미국, 독일, 스페인, 프랑스와 덴마크 등 각 나라에서 온 순례자들이 자기 나라 동물 소리를 흉내 냈는데, 한국 닭이 ‘꼬끼오’ 돼지는 ‘꿀꿀’ 그리고 개구리는 ‘개굴개굴’ 운다고 하니 우는 소리가 참 다르다며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 서로 언어로 소통하지만 ‘미소와 웃음’은 어디서나 통하는 만국 언어임을 새삼 확인했다.
다음날은 큰 도시에서의 관광 시간을 벌기 위해 아침 일찍 떠나 오후 2시쯤 도착했다. 어제 저녁식사 중 미국인 부부가 부르고스에서 알베르게 대신 Air B&B에서 묵는다는 말을 듣고 나도 오랜만에 혼자 쉬며 Hot bath하고픈 마음에 19달러에 방 하나를 예약했다.
-19달러에 독방 쓰다
열흘 동안 4명~20명과 한 방에서 자다가 혼자 방을 쓰고 목욕도 하니 순례 길에서 누리는 호사가 황송하다. 더욱이 옆방에 아무도 안 들어와 시내 중심의 방 두개 APT에 혼자 있었다. 근데 사람이 참 간사하다. 11일 밤을 여럿이 함께 자는데 익숙해지니 혼자 낯선 아파트에서 자는데 위층과 옆방에서 들리는 소리가 마치 누가 걸어 들어오는 것 같아 놀래곤 했다. 오늘은 침낭 안에서 안 자도 되는데, 그 역시 허전해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나의 적응력이 뛰어난 건지, 아니면 인간이 간사한 건지….
점심은 팜플로나에서 1주일 전 산 라면으로 때우고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 스페인에서 3번째로 큰 성당인 부르고스 대성당(13세기 건축)과 시내를 2시간 정도 돌아다녔다. 현대 건물과 중세 건물들의 어우러진 모습이 멋스럽다. 주중 저녁 시간인데 많은 사람들이 큰 광장에 모여 저녁과 음료수를 마시며 쇼핑과 수다를 즐기고 있었다. 배낭을 메고 20일 더 걸어야 하는 내게 쇼핑은 모두 그림의 떡. 저녁과 낼 아침에 먹을 음식이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것. 2주 만에 큰 도시에 왔는데 매연과 자동차 소리에 몸과 마음이 금방 지친다. 도시를 2시간 걷는 게 자연 속을 5시간 걷는 것 보다 더 쉽게 지치는 듯하다.
#Day 12~14 (부르고스 ~카리온 데로스 콘데스)
-내딛는 발자국에 정신을 집중해
어제는 혼자 자고 쉬면서 목욕도 한 덕분인지 거의 8시간을 시체처럼 잤다. 1시간을 걸어 도시를 벗어나 다시 자연 속을 걸으니 마음이 편해진다. 오늘 걸은 길은 미국 애리조나를 연상케 하는, 가로수 하나 없는 황량한 광야와 들판을 양 옆에 끼고 걸었다. 구름은 간밤에 데모를 했는지 씨가 말라 단 한 점도 없고, 한낮의 태양이 작열하는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오늘 자려던 알베르게는 예약은 받지만 5시까지 와야 한단다. 아! 4시간 동안 10마일을 가야하는데….
그때부터 2-3분씩 잠깐 쉬면서 죽어라 걸었다. 트레드밀을 3.0(1시간에 3마일 걷기)에 맞춰놓고 걷는 상상을 하며 같은 속도를 유지하려 애썼다. 다행히 주위 풍경이 황량한 들판뿐이라 챙 모자 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가리고 눈만 내놓고 땅만 보고 걸었다. ‘아! 인생의 광야를 지낼 때도 너무 멀리 보거나 두리번거리며 척박하고 황량한 현실에 낙담하지 말고,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고 내딛는 발자국에 온 정신을 집중해, 매일 하루씩만 살아내면 되는구나’란 작은 깨달음이 더운 땡볕 아래에서도 마음에 담긴다.
스페인은 세계에서 포도밭 면적이 가장 넓은 나라답게 카미노를 걷는 중간중간 끝없는 포도밭이 펼쳐지곤 한다(왼쪽). 투우장에서 보는 뿔 달린 소들이 한가로이 누워있다. 빨간 잠바를 보고 혹시 달려들까봐 내심 마음 졸이고 지나가는데 아무도 내게 관심을 안줘서 안도의 한숨을.
-알베르게는 현찰만 받아
밤 9시부터 골아 떨어져 다음날 아침 7시에 알람을 듣고 깨니 다른 3명의 알람이 같은 시간에 합창으로 울린다. 눈은 떴는데 무거운 돌이 온 몸, 특히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아 움직일 수가 없다. 2주 넘게 하루도 쉬지 못한 피로가 매일 조금씩 몸에 누적된 탓이겠지....
20분을 뒹굴다 눈을 뜨니 일곱은 떠나고 세 명이 남았다. 이제는 짐 싸는데도 꽤 속도가 붙어서 7:40 떠나 커피와 그로와상을 먹고 숙소를 나서니 동네가 안개에 묻혀 몽환적이다. 안개 낀 시골길을 40-50분쯤 걸으니 몸이 조금씩 풀린다. 오늘은 평소처럼 20마일 목표라 7마일쯤 걷고 이른 점심을 하고 가게에 들러 과일과 스낵을 사서 12시쯤 출발했다. 수중엔 5유로(6달러)만 남았는데 앞으로 들릴 시골 마을에는 은행은 물론 ATM 기계도 없어서 은행이 3개 있는 마을에서 현찰을 뽑아야 해서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 그때부터 하늘이 노래지기 시작했다. 가게는 신용카드를 받지만 알베르게는 현찰이 필요하다. 미국은 새벽 6시. 은행이 전화를 받을까? 반신반의로 은행에 전화를 했는데, 다행히 직원이 받아서 해결해줬다. 어느 곳에서나 작은 수수료로 현찰을 뽑을 수 있어서 현찰을 많이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
-손빨래하다
이 일로 너무 놀라고 진이 다 빠진 상태에서 가파른 언덕을 넘고 바람이 세게 부는 고원을 한참 걷다보니 아무래도 20마일을 걸을 수가 없었다. 4시 반쯤 다음 마을의 알베르게에 짐을 푸니 여행 중 제일 일찍 알베르게에 들어온 날이다. 중턱에 있는 시골 마을 알베르게에 딸린 식당에 손님은 20여명인데 그중 반은 동네 할아버지들, 모여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다. 주인이 할아버지라 그런지 거의 경로당 분위기다. 우리 방에 침대가 12개인데 3명만 있으니 조용하고 여유롭다.
잠시 누워 쉬고 샤워를 마치니 아침의 피곤이 많이 회복된다. 멈추기를 정말 잘했다는 마음이 흐뭇하다. 오전은 내내 흐리더니 오후에는 햇빛과 산바람이 너무 좋아서 모든 옷과 양말, 잠바와 수건을 꺼내서 손빨래를 했다. 얼마 만에 빨래판에서 하는 손빨래인가? 햇빛 쨍쨍 내리쬐고 백만불짜리 바람이 부는 마당에 빨래를 쭉 널고 나니 마음도 뽀드득 소리가 날만큼 깨끗이 빨린 느낌이다.
매일 저녁 저널을 쓰다 보니 이렇게 매일의 일상을 돌아보고 정리하던 게 언제였던가? 일 갔다 와서 밥먹고 치우고 책 읽다 자는 생활의 반복. 10분이라도 하루를 돌아보고 정리하는 시간조차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못할 만큼 왜 그리 바쁘게 살았는지... 아니면 그런 생각조차 없었나?
“One Life, Live it.” 한동안 이 말을 곱씹으며 걸었다. 왜냐하면 I want to LIVE IT !
한국에서 자전거를 분해해서 가져왔다는 50-60대 자전거 동호회원 열 두 분을 만났다.
-초생달과 천문회
다음날은 일찍 숙소를 나섰다. 시골 풍경에 걸 맞는 닭 우는 소리가 정겹다. 화씨 47도의 아침 공기가 제법 차다. 있는 옷을 다 꺼내 입으니 배낭이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다. 동쪽 하늘에 오리온의 삼성과 시리우스를 배경 삼아 초생달이 예쁘게 걸려있고, 머리 위에는 카시오페아와 북극성과 북두칠성이 빛난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보나 어림도 없다. 아마추어 천문회 활동을 하던 대학시절 그믐 때마다 관측회에 가서 누워서 별을 보던 때가 생각난다. 길 위에 서니 잊고 있던 많은 기억과 추억들이 길 따라 떠오른다.
드디어 오늘로 프랑스 생잔에서 출발해서 산티아고까지 가는 약 500마일(800km) 순례길의 반을 마쳤다. 오기 전에 16파운드 배낭을 메고 가까운 산 16마일을 세 번 걸어보니 힘들지만 해낼만해서 30일-33일을 예상하고 왔는데, 집안일도 없고 밥 먹고 자다가 종일 걷기만하니 하루에 16-20마일을 (8-9시간)를 걸을 수 있었고 생각보다 일찍 중간까지 걸어올 수 있었다. 목 주변에 10군데 벌레 물린 거 빼고는 아픈데 없이 건강함이 감사하다.
-순례자의 행복
며칠 동안 비슷한 풍경의 연속이다. 나무도 거의 없는 갈색의 평야와 하늘. 어제 아침에 만난 청년에게 ‘요즘은 그 많던 한국 사람을 거의 못 만난다’고 하니 이 길은 지루하고 볼 게 별로 없어서 많은 이들이 택시를 타고 건너뛰기도 한다고... 신기함과 경이로움에 연신 두리번거리며 호들갑 떨던 풍경도 없고, 도시 속의 화려함과 현란함도 없어지니 생각이 나의 내면으로 옮겨지면서 침묵 가운데 더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는 어부가 된다. 단순함과 침묵과 고요함이 주는 귀한 깨달음. 그래서 오늘도 카미노 위에서 행복하고 감사하다.
걸을수록 둘째날 수도원에서 준 <순례자의 행복>의 깨달음이 가슴 깊이 파고든다.
1. 행복하여라. 순례의 길이 눈을 열게 하여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례자여.
2. 행복하여라.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목적지를 향해 함께 걸어가는 것에 마음을 두는 순례자여.
3. 행복하여라. 길을 명상할 때 그 길이 수많은 이름들과 여명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는 순례자여.
<
글, 사진/ 모니카 이(페어팩스,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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