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티아고 가는 길2 (Camino de Santiago)
▶ Day 0 ~ Day 7 (생잔~ 나바레테: 125마일/200km)
‘‘용사의 언덕’에 있는 순례자상들.
유럽 각지에서 산티아고까지 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그중 약 65% 순례자가 걷는 가장 인기 있는 길은 프랑스 국경에서 시작하는 ‘프랑스 길’(필자도 이 길을 걸었다). 프랑스 남쪽 생잔 피드포르 마을에서 시작해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약 500마일(800km)이고, 하루 평균 17마일 걸으면 한 달이 걸린다. 순례자 중 온전히 자신의 두 발에만 의존하여 500마일을 완주하는 순례자는 15%에 불과하다. 그 외에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떠나는 ‘포르투갈 길’은 19%, 스페인 북부 해안을 따라 걷는 가장 아름다운 ‘북쪽길’은 6% 순례자들이 걷고 있다.
-Day 0
(생잔 피드포르 Saint-Jean-Pied-de-Port)
파리에서 떼제베(TGV) 기차로 4시간 달린 후 바욘에서 시골 기차로 갈아탔다. 삶의 무게만큼이나 커다란 배낭을 맨 세계 각지에서 온 2백여명의 순례자들이 기차 두 칸을 가득 메웠다. 영어, 불어, 서반어, 독일어, 이태리어, 한국어 등이 들리는 기차 안은 언어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설렘과 들뜬 마음이 얼굴과 목소리에 묻어난다.
1시쯤 생잔에 도착해서 순례자 등록을 마친 후, 산티아고의 상징인 가리비와 순례자 여권을 받고, 알베르게(숙소)에 짐을 풀었다. 프랑스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다 불이 켜있는 성당에 들어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앉으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나는 지금 무슨 마음으로 이곳에 와있지?”
얻어가려는 것도 없고 버리고 가려는 것도 없는 내게 순례란 단어가 너무 거창하다. 매일 하루씩만 생각하고 보이는 풍경과 가슴에 전해오는 느낌들을 온전히 누리며 한 달 동안 만날 사람들을 품은 기도를 올려드린다.
-Day 1-3
(피레네 산맥-론세스바예스-팜플로나)
첫날은 16마일의 피레네 산맥(고도 1430m)을 넘어야 해서 새벽 6시에 서둘러 출발했다. 어제 기차에서 만난, 신학과를 졸업하고 두 달 전 전역한 4명의 청년들과 같이 걷는 깜깜한 새벽길이 든든했다. 새벽의 보슬비는 고도가 높아질수록 점점 강한 비바람으로 바뀌며 판초는 사방으로 난리 브루스를 쳤다. 아름다운 피레네 풍경을 놓쳐 아쉽지만, 40대 마지막 생일날 좋아하는 비를 맞으며 구름 속 피레네를 넘던 감동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론세스바예스 성당에 2시쯤 도착해서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받고 수도원 잔디밭에서 싸간 점심을 먹었다. 16마일 산을 넘은 대부분 순례자는 그곳에 머물렀으나, 조금 쉬고 나니 기력이 회복된 난 4마일을 더 걸어 7시쯤 부르게스에 도착한 후 완전 뻗어 8시간을 시체처럼 잤다.
배낭을 풀고 싸는 게 아직 익숙지 않아 다음날 아침 8시쯤 숙소를 나섰다. 오늘은 동행 없이 혼자 9시간을 걸었다. 많은 순례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으며 “Buen Camino(부엔 카미노-좋은 길)”로 인사하며 환한 미소를 건넨다.
18마일을 걷고 도착한 알베르게가 문을 닫아 난감해하는데, 안다루시아 출신 스페인 아저씨 3명을 만났다. 이미 20마일을 걸었는데 2마일 더 가면 친구가 숙소를 잡아놨다며 나도 예약을 해주겠단다. 너무 피곤했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걸어가며 셋은 함께 노래도 부르고 내게 스페니쉬도 가르쳐줬다.
도착한 성당의 알베르게에 남은 침대는 한개. 자신들은 2마일을 더 갈 테니 나를 이곳에 묵으라며 침대를 양보해주었다. 낯선 동양인 여자를 위한 그들의 환대가 감동이었다.
함께 모여 저녁식사를 한 후 성당 다락방에 20여명의 순례자들이 모여 찬양과 기도와 카미노를 걷는 이유를 나누었고, 할머니 수녀님이 불어와 서반어와 영어로 통역을 했다. 절친의 아들이 자살해서 그들을 품고 걷는 캐나다인. 6주 후에 결혼인데 혼란한 마음을 안고 온 핀란드 아가씨. 법대가 적성에 안 맞아 휴학한 독일 학생, 그리고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시애틀, 프랑스, 페루 등에서 온 순례자들. 우리는 다른 언어와 문화 속에서 살고 있으나 ‘인류애’로 서로 연결되고 소통하는 큰 감동의 시간이었다.
다음날 인구 20만의 도시 팜플로나를 지났다. 며칠 만에 만난 도시의 골목과 광장을 돌아보며 투우 경기장과 이곳에서 작품을 쓰던 헤밍웨이 조각상을 구경했다. 점심 후에 팜플로나를 떠나 끝도 없이 펼쳐진 해바라기 밭을 양옆에 끼고 그늘 없는 10마일을 더 걸었다. ‘용서의 언덕’ 위의 순례자의 철판조형물 앞에 서니 그림 같은 풍경과 산 위에서 불어오는 백만불짜리 바람이 마음의 묵은 때와 피로를 모두 날려버렸다.
십자가 아래 놓여진 순례자 배낭과 스틱(왼쪽). 왼쪽은 포도주가 나오고 오른쪽은 물이 나오는 수도_이라체 수도원.
-Day 4 ~5
(우테르가 - 푸엔테 라 레이나 - 에스테야)
어제 함께 걸은 청년들은 아직 꿈나라. 그래서 혼자 길을 나섰다. 이 길에서는 만남과 헤어짐이 자유롭고 상대에게 기대가 없어서 섭섭할 것도 없다. 오늘 어떤 길을 얼마만큼 걸을지 모른다. 그냥 내 앞에 난 길을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걸을 뿐. 어제 한 순례자에게 날씨를 물으니 여기서는 확인을 안 한단다. 비가 오면 비옷을 입고 해가 강하면 모자를 쓰고… 주어진 날씨에 순응하며 걷는다고. 그래서 나도 그냥 떠났다. 필요한 건 배낭 안에 다 있으니까.
좁은 들판을 한 시간쯤 걸었는데 노란 화살표가 한참 안 보였다. 길이 점점 좁아지더니 마침내 없어지는 게 아닌가?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가니 들꽃과 풀에 달린 달팽이들에 정신이 팔려 오른쪽으로 꺾인 노란 화살표를 놓친 게다. 왠지 아깝단 생각이 든다. 근데 가만히 생각하니 도착해야할 목적지도 없는데 뭐가 아까운지… 길을 잃은 그 곳도 길이였고 덕분에 온갖 종류의 들꽃들을 만날 수 있었으니 아무 것도 잃은 게 아니었다.
오늘은 인구 200명 내외의 스페인 시골마을들을 1-2시간마다 지났다. 빨간 지붕의 마을 중앙에는 항상 성당의 종탑이 솟아있고 정겨운 종소리가 자주 울린다. 지나는 성당마다 들어가 기도를 했다. 창문이 작은 로마네스크식 성당 안은 어두워서 늘 촛불이 밝혀져 있다. 어둠 속에서 고개를 숙인 채 십자가에 달려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가슴에 파고든다.
알베르게 안에는 보통 10-20개의 침대가 있다(왼쪽 위). 피레네 산맥의 석양(오른쪽 위). 순례자여권. 매일 성당이나 알베르게에서 도장을 받은 기록이 있어야 산티아고에서 순례자증서를 받을 수 있다.
-Day 6-7
(로스 아르코스 - 비아나 - 로그로뇨)
집 떠난 지 일주일. 하루도 쉬지 못하고 짐을 싸고 풀며 8-10시간을 걷다보니 어제부터 입안과 혀 밑이 헐기 시작하고 무릎과 발목과 어깨가 점점 아파온다. 지난 3일 동안 매일 20마일을 걷는 게 아무래도 무리였나 보다. 걷다보면 자꾸 욕심이 생기는 내 모습을 만난다. 여기까지 와서 누구랑 경쟁을 한다고 이리도 욕심이 많은지… 그래서 오늘은 14마일에서 멈췄다. 4시쯤 알베르게에서 쉬다가 성당 앞 계단에 앉아 석양을 감상한 후 9시쯤 귀마개와 안대를 하고 꿈나라로….
다음날 아침 6:30에 일어나니 10개 침대에 자고 있는 사람은 나뿐. 반은 이미 떠났고 나머지는 떠날 채비를 마쳤다. 아침식사 후 7:30쯤 알베르게를 나서니 어제 4시부터 쉬고 7시간 넘게 자고난 발걸음이 날아갈듯 가볍다. 역시 쉼은 삶의 비타민.
오늘은 24세 한인청년을 만나 몇 시간을 같이 걸었다. 전공이 적성에 안 맞아 휴학하고 캐나다에서 1년 일해서 번 돈으로 3개월째 여행 중이란다. 고등학교 때 법정 스님의 책을 읽다 ‘제비꽃은 제비꽃으로 살 때 행복하다’란 글이 깊이 다가와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찾는 중이란다. ‘이 길을 걷는 며칠이 너무 행복해요. 캐나다 주방에서 일하며 요리에 흥미를 발견했어요’라며 얼굴 한가득 번지는 미소가 맑다.
이곳에서 20대에 6개월부터 길게는 1년 반을 여행하는 젊은 친구들을 예닐곱 명 만났다. 돈이 떨어지면 일을 하며 경비를 벌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가는 젊은이들. 남이 가는 길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는 대신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을 만나기 위해 혼자 떠나온 젊은 청년들의 용기가 대견하여 큰 격려와 박수를 보낸다.
사람들이 ‘왜 산티아고에 가냐’고 물으면 ‘그냥 넋 놓고 지칠 때까지 걷고 싶어서’라고 답하곤 했다. 오늘이 그렇게 지칠 때까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들판을 야곱처럼 터벅터벅 혼자 걸은 날이다.
길 위에 선지 오늘로 7일째. 열심히 걷다보니 어느새 순례길의 1/4을 마쳤다. 워낙 걷는 걸 좋아하고 잘 걷는 건 알았지만 하루에 7-9시간씩 걸어내는 스스로에게 많이 놀란다. 이제 취미와 특기란에 모두 ‘걷기’라고 써야겠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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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모니카 이(페어팩스,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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