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믿고 살면 편할지는 모른다.
2.077책으로 만들어진 조선왕조실록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있다. 요즈음 같은 예측불허의 격동기에는 개인들도 물론이지만 나라에서는 모든 경험과 지혜를 동원하고 그래도 부족할 때는 역사를 들추어 보게 된다. 오랜만에 한국을 다녀왔다. 일정 중에 대통령이 국사를 보는 청와대도 방문했다. 또한 없는 시간이었지만 극장에 가서 ‘남한산성’이라는 영화도 한편 보게 되었다. ‘삼전도의 굴욕’에 대한 내용이어서 줄거리는 알려진 대로이다.
근자에 회자되고 있는 ‘힘이 없는 정의는 무능하다’,또는 ‘힘이 없는 평화는 무용지물’과 관련하여 ’타협과 굴욕‘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조율하려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현실과 이상사이에서 번민할 여유조차 녹록치 않는 변화무쌍한 한국의 외교상황, 그런 시국과 맞물려 돌아가는 개개인들의 생활들이 영화 ‘남한산성’과 겹쳐서 마치 칼날 위를 걷다가 돌아 온 느낌마저 든다.
실록은 익히 알려진 대로라면 왕의 사후에 기록되고 보전하였다. 왕은 이미 죽은 후였으나 선대에 대한 후대왕의 부당한 압력까지를 피하기 위해서 ‘국조보감’이라고 선대의 선행만을 발췌해서 보여주는 것으로 실록본연의 가치를 지켜왔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런지 적어도 ‘조선왕조실록’은 그 자체로만 본다면 승자(勝子)의 역사라기보다는 사실(史實)에 충실했다는 것에 민족적 자부심을 가질 만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의 기억에는 ‘풀이나지 않는 무덤’과 ‘선죽교의 피’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되새겨도 그 가치가 여전하다고 생각한다.
려말선초(麗末鮮初)는 왕권의 교체기이자 그야말로 격랑기이다. 이 시기는 중국도 원명(元明)교체기였으므로 누가 우군인지 피아구분마저 모호했다. 요즈음처럼 말이다. 따라서 국내상황도 반전의 반전을 거듭한다. 2017년 회오리치는 대한민국 땅에 명분도 실리도 없고, 국익도 자존심도 없는 일부 야당정치인들을 보고 있자니 더욱 그렇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어렸을 적에 노래까지 만들어 불렸던 최영 장군은 위화도회군에서 돌아 온 이성계에게 전혀 엉뚱하게 ‘부정축재’ 죄목으로 죽임을 당한다. ‘내게 죄가 있다면 무덤에 풀이 날것이요, 없다면 풀 한포기도 나지 않을 것이다.’ 능참봉이라는 관리까지 임명하였지만 풀이 살아나지 않아서 ‘적분(赤墳)’이라고 불리웠다. 최영은 우왕의 실세이자, 이성계의 상관이었다. 모든 군사를 이성계에게 주면서까지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요동정벌’을 꾀했는데 뒤통수 맞은 것이다.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과 정몽주, 이성계는 이때까지도 한패였다. 정몽주는 불교국가인 고려에서 유교인 성리학의 대가였으므로 명분에 죽는 사람으로 그에 걸맞는 생을 마친다. 그도 개혁에 동참했고 의리도 지켰다. 그러나 정도전의 역성혁명(易姓革命)에는 따를 수가 없었다. 마침 이성계가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다친 걸 보고 병문안 갔다가 이성계의 삼남 이방원의 회유 ‘하여가(何如歌)’에 대한 그 유명한 답가 ‘단심가(丹心歌)’는 조선개국의 핏값으로 선죽교에 남겨진다.
최영과 정몽주의 충심은 그야말로 의심이 없이 충성으로 읽혀진다. 그것은 바로 왕에 대한 것이자 ‘국가’에 대한 것이었다. 왕권국가에서의 왕은 곧 국가이기 때문이요 국가는 백성까지를 아우르는 포괄적 의미였다. 그것은 흔하게 회자되는 ‘아부(阿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과연 21세기 신자유주의의 기세가 온 지구상을 뒤덮고 있는 상황에서 케케묵은 ‘명분(名分)과 실리(實利)’를 따질 겨를조차 부질없는 세상이 아닌가, 비록 거창하게 외교용어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일상생활에서 선택의 기로에 맞닥칠 때마다 떠오르는 화두(話頭)라고 볼 수도 없는 게 아닌가 한다. 당시에는 실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듯이 명분같지도 않는 명분만 붙들다가 이도저도 다 놓쳐버린 일들 또한 다반사이다 . 그렇게 시대는 흘러가고, 반전되고, 진보한다. 미국에 되돌아오니 동부의 단풍은 완연하다. 가을 국화주 한잔에 떠올리기조차 부끄러운 현실에서 ‘적분(赤墳)과 단심가(丹心歌)’로 그 적조함을 덜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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