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철 연세대 철학과 교수
어렸을 적 기억이다. 밥 먹다가 젓가락이 물에 빠졌다. 갑자기 굽어 보이는 게 아닌가. 참 신기했다. 국민학교에서 그것은 착시현상이라는 사실을 배우고 나서는 더 이상 신기하지는 않았다. 젓가락만이 아니라 직선의 길이도 양 끝에 뭐가 달려 있느냐에 따라 같은데도 달라져 보인다. 공 주위에 더 큰 공으로 둘러쌓아 놓으니까 더 작은 공에 둘러싸였을 때보다 더 작아 보인다. 이런 여러 가지 착시 사례를 접하고 나서 나는 내 눈을 더 이상 맹신하지 않는다. 과학상식은 우리를 깨우치는 참으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얼마 전에 불교철학의 대가를 만난 적이 있다. 대뜸 하시는 말씀이 “보이는 것은 다 환상이야”다.
이 말(唯識論)은 착시현상과 달리 그 울림이 좀 오래갈 것 같다. 왜냐고. 어떤 것이 착시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재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설명하는 과학이론을 공부하고 나면 더 이상 매직도 아니고 내 눈을 탓할 일도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고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가끔 환상을 본다면 몸이 극도로 피곤하거나 정신이 좀 이상해진 것이라고 할 텐데 ‘우주삼라만상이 몽땅 다 환상이라니!’ 이 말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증명도 반증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죽는 순간에 가보면 모두 다 일장춘몽이라고 한다. 인생이 한바탕 꿈이라면 그게 바로 현실 아닌가. 보이는 것 모두가 환상이라면 그 환상은 이미 환상이 아니라 현실 아닌가. 혼자서 꾸면 꿈이지만 열 명이 같이 꾸면 무엇이 되는지 아는가. 현실이 된다. 아라비아 속담이다. 내가 혼자 헛것을 보면 환상이지만 우리 모두가 항상 헛것만 보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현실이 된 거다. 리더는 비전을 가져야 한다고들 한다. 비전은 결국 미래에 현실화될 현재의 꿈이다. 꿈은 다른 말로 높은 목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리더는 환상을 좇는 사람들인가. 정치지도자가 사기꾼과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도 꿈을 팔고 다니는 사람이기 때문인가.
콜럼버스는 ‘지구는 둥글다’는 과학이론을 정립한 사람은 아니다. 최초로 믿은 사람도 아니다. 그보다 이전에 그것을 주장하고 믿은 사람들은 많다. 항구에 들락날락하는 배들이 보였다 안보였다하는 것을 조금만 주의 깊게 관찰해도 둥글다고 하는 말에 동의할 수 있다. 지구가 둥글다는 말을 믿고 실제로 행동에 옮겨서 성공한 최초의 사람이 바로 콜럼버스다. 그 성공이 있기까지 십수년을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면서 ‘신대륙항로 개척 프로젝트’ 보고서를 보여줘도 다 퇴짜 놓는다. 여러분이라면 콜럼버스와 같이 환상의 꿈을 좇는 ‘사기꾼(?)’에게 투자하겠는가. 달걀세우기에서도 이미 사기꾼 기질을 보인 전과가 있는데도 말이다.
결국 콜럼버스의 배는 인도를 향해 출항했다. 비록 발견한 곳은 아메리카이긴 하지만… 가도 가도 육지가 나타나지 않자 불안에 떨던 선원들이 선상반란을 일으킨다. 콜럼버스를 돛대에 묶고 목에 칼을 들이댄다. 당장 배를 돌리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나에게 이틀만 다오. 그러고도 육지가 나타나지 않으면 배를 돌리겠다.” 이 말에 겨우 목숨은 건진 콜럼버스는 선장실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조용히 독백한다. “나도 한 번 가보지 않은 길인데…” 환상이 환상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그 비전을 공유할 팔로어가 필요하다. 큰 프로젝트일수록 꿈꾸는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환상만을 좇다가는 목숨도 내놓아야 할 판이다.
꿈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내가 꾸고 있는 게 꿈인 줄 알면서 꾸는 꿈과 모르고 꾸는 꿈이 있다. 알고 꾸는 꿈이 진짜 좋은 꿈이다.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면 나는 그것을 할 수 있다.” 조너선 리빙스턴의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말이다. 애플·구글·페이스북·테슬러 다 꿈을 꾸는 기업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꿈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 단지 그것을 실현할 방법을 열심히 찾고 있을 뿐이다.
꿈과 현실의 차이는 무엇인가. “현실에서는 할 수 있는 것만 하는데, 꿈속에서는 할 수 없는 것을 해요.” 이 말을 한 8살짜리 아이는 벌써 철학자다.
혼자서 헛것 보지 마라. 꿈은 같이 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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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철 연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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