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택시운전사’라는 한국영화를 관람하면서 대학교 1학년에 입학하자마자 1980년 5월의 봄에 민주화를 외치며 신발이 닳도록 데모하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정작 기자의 관심을 끈 것은 독일 제1공영방송 소속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활약상이었다. 서슬이 퍼런 신군부 독재 시절 외신기자라고 예외는 없을 터인데 생사를 오가는 급박한 상황에서 광주사태의 진상을 전 세계에 생생하게 전한 그의 투철한 기자정신에 새삼스레 고개가 숙여졌다.
그 영화를 보고 난후 한국일보 기자로 입사했다가 TV 방송국 기자로 옮겨 10년간 일했던 30대 기자 시절의 한 에피소드가 불현듯 생각이 났다. 1992년 4월29일 LA폭동이 터지던 날 비상체제로 돌아선 보도국에서 밤샘근무를 하면서 시청자들로부터 빗발같은 항의전화를 받았다. 자신이 운영하는 업소가 불이 났는 지 안 났는 지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에서 피해속보를 전해야 할 방송국에서 드라마와 쇼가 방송되고 있으니 울화통이 터진 시청자들이 전화에다 대고 녹화방송하는 방송국의 속사정도 모르고 ‘니가 기자냐?’‘방송국이 정신 나간 것 아니냐?’며 입에 담기도 힘든 험한 욕설을 해댔다.
폭동 첫날 밤 보도국이 비상야근체재로 돌아선 상황에서 TV를 보고 통신을 점검하다 사무실 소파에서 쪽잠을 청했는 데 30일 아침에 보도국장은 당장 기자를 호출해 사우스 LA 현장 취재를 지시했다. 다른 기자들도 있는 데, 왜 하필 나보고 가라고 하는 지 좀 야속하기도 했고 흑인 폭도들이 설치는 무법천지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니 솔직히 겁도 났지만 비디오 카메라를 멘 선배와 미국 기자들도 들어가길 꺼려하는 사우스 LA 깊숙히 진입해 폭도들의 한인업소 방화와 절도 현장을 생생히 담고 피해업주들의 인터뷰를 해올 수 있었다. 밤을 새우다시피한 상태라 비몽사몽간 헤매면서 사우스 LA에서 한인타운으로 돌아오다가 흑인폭도들이 탄 차를 실수로 들이받아 이들을 피해 전속력으로 도망치기도 했지만 밤새도록 ‘니가 기자냐?’라며 귀가 따갑게 먹은 욕을 상쇄한 것 같아 마음이 뿌듯했다.
또한 차장기자로 일하던 1996년 중반경 한인타운에서 대형사기사건-너무 오래돼 내용이 잘 기억도 나지 않는-이 터졌는 데 당시 근무하던 방송국에서만 낙종을 했다. 사장이 부르더니 “어떻게 다른 방송 및 신문사는 모두 커버가 됐는데 우리만 놓쳤나?”라고 불호령이 떨어졌다.
보도국의 차장기자로서 대형 사건을 놓쳤으면 대처방안이 있어야 할 것이고 또 경위 등을 파악해 바로 보고해야 하는 데 제대로 사후 수습을 못하는 것이 한심하다며 사장실에서 30분 이상을 무참하게 깨졌던(혼나다의 기자사회 속어)것 같다. 결국 사장에게서 “니가 기자냐?”라는 욕설이 터져 나왔다. 사장실에서 나온 후 자존심이 너무 상해 속으로 분을 삭이면서 한동안 혼자서 계단에서 울었다. 그 다음부터 사건사고를 놓치지 않도록 눈에 불을 켜고 경찰과의 연락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취재원으로부터 수시로 제보 시스템도 강화했던 생각이 난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경영하는 리커에서 맥주를 훔쳐 달아나던 히스패닉계 청소년들에게 총을 쏴 그중 한 명을 숨지게 한 김조원씨 사건을 다루게 됐다. 그러나 히스패닉계 커뮤니티가 재판부의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김씨가 평소에 베푼 이웃사랑의 실체를 파악하게 되면서 심도있는 취재를 진행한 끝에 김씨가 살인혐의로 수감되어있는 LA카운티 감옥을 찾아가 김씨와 특종 인터뷰도 하고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부인 김화성씨와 애틋한 부부사랑을 “세발의 총성―깨어진 꿈”이라는 다큐로 제작해 KBS가 해외 한국어방송사들의 프로그램을 대상으로 시상하는 ‘서울프라이즈’ 수상작 가운데 최우수작으로 뽑혔다. 대형사기사건을 놓쳤던 당시 기자를 엄청나게 깼던 사장이 흡족해 하셨던 생각이 난다.
요즘 인터넷과 스마트폰 등의 대중적인 보급으로 미디어 환경이 위축되는 가운데 기자의 위상도 예전에 비해 못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추세이다. 오죽하면 일부에서는 기자들을 비하하는 ‘기레기’라는 단어까지 등장하고 있을까? 그러나 오늘도 허리케인, 지진, 폭동 등 위험한 사건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현장 소식을 전하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소신있게 진실을 밝히고 탐사보도로 정의를 구현하려는 기자들이 없다면 과연 어떠한 세상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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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률 특집2부장·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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