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서 52만명 연구 결과 과체중일수록 심장병에 취약
▶ 기존 ‘비만의 역설’ 주장 뒤집어
“근육 많으면 질병 회복 빨라” 일부에선 여전히 과체중 옹호
‘건강한 비만’ 논란은 진행형
‘뚱뚱해도 건강하다(fat but fit)’. 그 동안 여러 연구에서 과체중인 사람이 혈압만 정상이라면, 건강할 수 있다는 결론이 많았다.
이 같은 ‘비만의 역설(obesity paradox)’은 의학계에서 뜨거운 감자다.
최근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팀이 52만명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연구에서 ‘대사적으로 건강한 비만은 없다’는 결과가 나오면서 비만의 역설이 힘을 잃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살찌면 마른 사람보다 건강”
살찐 사람이 마른 사람보다 건강하다는 ‘비만의 역설’은 1990년대부터 서구에서 시작됐다. 국내에서도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결과가 잇따랐다. 성기철 강북삼성병원 순환기내과 교수팀은 2002~2013년 건강검진을 받은 16만2,194명의 체질량지수(BMI)에 따른 사망률을 분석한 결과, 저체중인 사람의 사망률이 정상체중인 사람보다 53% 늘었고, 과체중이거나 비만인 사람 사망률은 정상체중보다 23% 줄었다고 했다. 암, 심혈관질환과 같은 질병에 의한 사망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과체중인 사람이 암 수술 후 사망률이 낮고, 뇌졸중에 걸려도 회복력이 빠르며, 심부전에도 더 오래 산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전문가들은 “몸에서 에너지를 만드는 공장이 근육인데 근육 많은 과체중인 사람이 빼빼 마른 사람보다 건강하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했다.
심장병 환자가 과체중이거나 가벼운 비만이라면 저체중보다 예후(병 치료 뒤 경과)가 좋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노정현 인제대 일산백병원 내분비대사내과 교수는 “심혈관 환자의 비만 지표(BMI-체지방-허리둘레-중심비만 등)가 높을수록 심혈관 질환의 예후가 더 좋았다”고 했다.
적당히 비만하면 심부전을 앓아도 생존율이 높아진다고 한다. 2만8,209명을 대상으로 한 메타분석에선 정상 체중 심부전 환자보다 과체중-비만인 심부전 환자의 심혈관 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이 각각 19%, 40% 낮았다.
65세 이상 고령인은 살찔수록 뇌졸중이 나타나도 회복력도 빨랐다. 김연희 삼성서울병원 재활의학과 교수팀이 급성 허혈성 뇌졸중을 진단 받은 2,057명을 분석한 결과, 65세 이상 고령인 환자에서 고도비만그룹(37명)이 비만그룹(326명)이나 과체중그룹(316명), 정상그룹(391명), 저체중그룹(62명)보다 일상생활 능력이 빨리 회복했다.
한 가정의학과 교수는 “뚱뚱한 사람이 영양상태가 더 좋아 병에 걸려도 더 잘 견디기 때문에 비만의 역설은 가설에 불과하지만 크게 틀리지 않는다”고 했다. 사망률이 높은 암, 폐결핵 등 소모성 질환(에너지를 많이 쓰는 질환)에 걸리면 체중이 줄어드는데 이 때문에 통계적으로 과체중인 사람이 마른 사람보다 더 오래 산다는 것이다.
“대사적으로 건강한 비만은 없다”
그러나 최근 52만명의 비만인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추적 조사에서 ‘비만의 역설’이 부정되고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와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의 최신 공동 연구는 유럽 10개국의 과체중 혹은 비만인 52만명을 조사한 결과, 이들의 혈압ㆍ혈당ㆍ콜레스테롤 수치가 정상이라도, 정상 체중보다 28%나 심장마비를 초래하는 관상동맥 관련 질병에 더 노출됐다. ‘유럽 심장 저널(European Heart Journal)’ 최신호에 이 같은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연구를 주도한 임페리얼 칼리지의 카밀 라살 박사는 “건강한 비만은 환상일 뿐, 건강해 보여도 과체중이면 심장병에 더 취약하다”며 “혈압과 혈당, 콜레스테롤이 정상 범위 내에 있어도 과체중은 여전히 위험하다”고 했다. 아미타바 배너지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교수는 “대사적으로 건강한 비만은 없으며, 대사증후군이 없어도 비만하다면 심혈관질환 위험이 늘어난다”고 했다.
임수 분당서울대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건강한 비만은 이론적으로 가능하지만 BMI가 30 이상이라면 거의 대부분 대사 이상이 있고, BMI가 25 이상이어도 상당수가 대사 이상이어서 실제적으로 매우 드물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발표된 비만의 역설 논문은 비만 측정 기준, 즉 BMI가 잘못됐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보통 비만 기준으로 BMI가 쓰인다. BMI는 몸무게(㎏)를 키(m)의 제곱으로 나눈 값이다. 정상 체중(18.5~22.9), 과체중(23~24.9), 비만(25~29.9), 고도 비만(30 이상), 저체중(18.5 미만)으로 구분한다.
우리나라 비만 기준이 낮아 실제로 정상인 사람이 과체중이나 비만으로 진단되면서 생긴 착시현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국가 빅데이터를 이용한 전향적인 대규모 연구에서 사망률이 가장 낮은 BMI 구간이 세계보건기구(WHO) 아시아ㆍ태평양 기준으로 과체중에 해당되는 BMI 22.5~25.0이라는 사실을 들어 비만 기준(BMI 25 이상)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들은 “우리나라 사람의 식습관이 서구화되고, 키도 서구와 비슷하게 커져 우리나라가 적용하고 있는 아시아ㆍ태평양 비만 기준(BMI 25 이상)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비만 기준 정도(BMI 27.5 이상, 미국 비만 기준은 BMI 30 이상)로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순집 대한비만학회 이사장(부천성모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도 “BMI라는 숫자 하나로만 비만 진단하는 것은 위험하다”며 “비만 기준에 복부비만 등의 수치도 감안해야 한다”고 했다.
‘건강한 비만’은 결론 나지 않은 진행형이라는 주장도 있다. 황희진 국제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비만건강학회 총무이사)는 “최근 연구결과 추이를 볼 때 ‘근육 없는 저체중보다 근육 많은 과체중이 낫다’는 게 결론”이라며 “근육이 많으면 잘 넘어지지 않아 낙상을 당하지 않고, 혈당 조절에 허벅지나 종아리 근육이 크게 기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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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익 의학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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