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내린 워싱턴에 때 아닌 봄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양극화 교착상태로 오랫동안 얼어붙어 온 워싱턴 정계를 깜짝 놀라게 한 지난주 공화당 트럼프 대통령과 민주당 의회 지도부의 초당적 타협이 몰고 온 ‘이상 기류’다. 멸종 위기에 처한 ‘초당적 합의’를 소생시키는 그 어려운 일을 트럼프 대통령이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첫 실험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오바마가 8년 동안에 못한 것을 트럼프가 8일 만에 해냈다는 어제 백악관의 자화자찬 브리핑에 기자들도 반박하지 않았다)
트럼프는 오바마케어 폐지 실패 후 갈등이 악화된 공화당을 제쳐놓고 취임 후 계속 무시해 오던 민주당과 손을 잡고 정부지출 예산과 국가부채 한도 증액, 그리고 시급한 태풍피해 복구지원을 연계시킨 법안을 자신이 좋아하는 속전속결로 성사시켰다. 예산과 증액 시한을 12월 중순까지로 3개월만 미루는, 공화당 지도부가 강력 반대해온 단기 연장안이었다.
경악한 공화당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6일 타결된 대통령과 민주당의 협상안은 24시간이 지나지 않아 연방상원을, 다음날 연방하원을 압도적으로 통과했다. 정부폐쇄와 국가 디폴트 사태를 위협하며 9월말까지 끌고 갈 것으로 우려되었던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워싱턴의 예산전쟁을 피해갈 수 있게 되었고 막막한 재난지역에 복구지원금 전달도 신속해졌다.
‘믿기 힘든 로맨스’ ‘트럼프, 초당적 강물에 발을 담그다’ 등으로 표현된 이번 협상의 파급효과를 워싱턴포스트는 ‘의회 정치지형 변화’의 시작으로 분석했고, 월스트릿저널은 ‘트럼프-슈머-펠로시 : 워싱턴의 새로운 질서인가’라고 물었으며, 뉴욕타임스는 이념적으로 무소속 성향을 보여 온 실용주의자 트럼프가 ‘150년 역사의 양당체제를 뒤 흔든다’며 제3당 출현의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번 협상으로 민주당의 입지가 강화된 것은 확실해 보인다. 취임 후 공화당과만 소통하는 트럼프의 외면에 존재감조차 미미했던 민주당의 위상이 달라진 것이다. 잠정적이라 해도 이민과 예산 등 어젠다 통제권이 민주당에게도 가능해졌다. 세제개혁과 드리머 구제를 앞두고 새로운 모멘텀을 얻은 셈이다.
자당 보스에게 뒤통수를 맞은 공화당은 일시 휘청댔다. 애초부터 서로 싫어한 공화당과 트럼프의 역학관계가 지난여름의 ‘트럼프 고삐잡기’에서 가을의 ‘공화당 왕따 시키기’로 바뀐 모양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민주당과의 전격 협상은 공화당에 대한 트럼프식 보복”이라고 풀이하기도 했다.
내분이 심한만큼 공화당내 반응도 다양하다. 극우파 일부에선 “무늬만 공화당인 트럼프가 우리를 팔아넘겼다”고 배신에 분개하며 “트럼프는 이제 공화당의 리더가 아니다”라고 선언하지만 충성 여전한 트럼프 핵심표밭은 ‘무능력한’ 지도부의 자업자득이라고 반박한다. 일반의원들은 민주당에게 원하는 것 다 주는 ‘트럼프의 퍼주기’를 우려하고 의회지도부는 재난발생 비상시의 ‘응급조처’라고 의미를 애써 축소한다.
사실 오랜만에 성사된 ‘초당적’ 분위기에 들떠 과잉기대를 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번 타협이 트럼프 특유의 일회성인지, ‘초당적 정치’의 시작인지는 추정하기조차 아직 이르다. 양극화로 빚어지는 교착상태는, 기성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혐오감을 부르는 워싱턴의 고질이지만 초당적 정치를 기대하기엔 장애요소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민주당도 트럼프도 곧 타협 한계라는 현실에 부딪칠 것이다. 우선 민주당 지도부의 협상 운신의 폭은 상당히 좁다. 당 전체에 트럼프 적대감이 팽배해 있어 협상에서의 웬만한 양보에도 격렬히 반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국정을 지지하는 민주당 응답자는 8%로, 오바마에 대한 공화당 지지의 절반에 불과하다.
트럼프 역시 감세와 이민 등 그의 핵심표밭의 주요 이슈를 다루는 ‘빅 딜’에서는 민주당의 요구를 대거 수용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며 상하원을 장악하고 있는 공화당을 또다시 왕따 시키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초당적 타협을 꾀하는 트럼프의 행보는 이번 주에도 계속되고 있다. 화요일엔 중도파 양당 의원들을 백악관 만찬에 초청해 다음 ‘빅 딜’이 될 세제개혁을 주제로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었으며 민주당의 척 슈머 상원대표 및 낸시 펠로시 하원대표와 다시 만찬을 가진 수요일 오후엔 10여명의 중도파 의원들과 백악관 간담회를 열기도 했다.
‘오바마 반대’를 최우선 과제로 공언했던 야당시절 공화당과는 달리 민주당 지도부도 “반대를 위한 반대는 안할 것”이라며 합리적 협상 자세를 다짐하고 있다.
대통령이 반대당과 타협을 하면 파워의 역학이 얼마나 쉽게 변하는 가를 알게 된 트럼프는 이번 초당적 협상의 성과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다고 측근들은 전한다. 보수적인 폭스뉴스만이 아니라 진보적인 MSNBC와 CNN, 워싱턴포스트까지 ‘초당적’ 미디어의 긍정적 평가가 칭찬에 약한 트럼프에게 재시도를 유혹하고 있다는 뒷이야기도 전해진다.
즉흥적인 기질의 대통령이 장기적인 비전을 필요로 하는 초당적 합의에 어디까지, 언제까지 관심을 가질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심오한 국정철학에 근거한 통치이든, 미디어의 칭찬에 신이 난 방향 전환이든에 상관없이 꽉 막혔던 교착상태를 풀어주는 ‘초당적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최소한 우리의 드리머들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의 근거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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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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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총 2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너무 기대하지마 ~
좋은 글 고맙습니다. 다만 마지막 한줄이 걸리네요. " 우리의 드리머들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란 ..." 그들이 왜 특별한 것이지요? 지금도 한인타운 다운타운 가보면 홈리스들이 득실거리고 치안은 엉망이고 업주들은 이런외적인 요소때문에 힘들어하고 이런 시민들을 도와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어요.시의회도 주의회도 연방에서도요. 그런데 왜 드리머들이 가장큰 잇슈가 되는지 늘 궁금헀어요. 세금내는 시민들의 고통은 누구도 신경안쓰는데 왜 그들을 위해서 모두가 나서는지? 제 사견이지만 너무 정치적인 제스처라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