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이라는 약칭으로 불렸던 정치인 김덕룡은 YS맨이었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6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그는 70년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의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 YS 최측근 그룹 ‘상도동계’의 핵심 일원으로 야당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며 수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3당 합당 때 YS를 따라 여당이 된 뒤 문민정부 정무장관을 거쳐 이명박 정부에서도 대통령 특보를 지냈고, 그러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공개 지지하며 캠프에 참여해 새 정부에서 평통 수석부의장이 됐다.
전통 야당에서부터 보수 한나라당까지 넘나들며 5선 의원을 지낸 김 부의장은 중도 이미지가 강하다. 이른바 ‘개혁 보수’ 성향으로,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통합을 강조해왔다. 문 정부가 그에게 평통 수장을 맡긴 것은 결국 이런 ‘통합’에 방점을 둔 선택으로 보인다. 그가 지난주 취임사에서 “통일정책에 대한 국민적 합의에 바탕한 국민통합이야말로 통일준비의 출발점”이라고 말한 것은 그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평통(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은 대통령이 의장을 맡고 있는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로 위원수가 국내외에 1만 명이 넘는 거대 조직이다. 정권마다 조금씩 성격이 변하기는 했지만 대통령의 정책 기조를 저변에서 뒷받침하는 일종의 ‘친위부대’인 셈이다. 여전히 이념적 대립상이 심한 상황에서 중도 인사가 이끄는 새로운 평통이 실제로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통일정책 관련 국민합의를 이뤄낼 수 있다면 그야말로 단체의 이름값을 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큰 그림이야 이렇지만, 그러나 LA를 비롯한 해외 지역 평통이 요즘같이 엄중한 상황 속에서 이같은 역할을 충실하게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평통위원직을 ‘감투’로만 여기는 일부 인사들의 행태나 골프대회 홀인원 조작 파문 등 과거의 불미스런 사건 등으로 인해 “도대체 뭐 하는 단체인지 모르겠다”는 인식이 존재하는 것도 현실이기 때문이다. 인원이 많다보니 언제부턴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어 있는 단체이지만, 탄핵 및 조기대선 정국과 맞물려 뒤늦게 시작한 이번 18기 평통도 출발부터 그리 순탄치만은 않아 보인다.
아직 지역협의회 위원들이 함께 모여보기도 전인데, 평통사무처가 위원들 전원에게 FBI 범죄경력 증명서 제출을 요구한 것을 놓고 일부에서 반발을 하면서 뒤숭숭한 분위기가 전해지고 있다. 평통 측은 올해부터 보안업무 시행 규칙이 바뀌어서 전 세계 모든 평통위원들이 해당 국가의 공인 기관이 발행한 범죄기록 증명서를 제출토록 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지난 17기 때 미국 내 한 협의회에서 평통위원이 성매매 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사퇴한 사례 등이 있었기 때문에 범죄 기록 확인 등 신원조회를 강화하는 것이 불가피할 수는 있으나, 이를 미리 알려주지 않고 느닷없이 통보한데다 제출 기한도 촉박하게 잡는 등의 일처리는 매끄럽지 않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더 큰 문제는 다른 데 있다. 바로 평통사무처의 평통위원 비공개 정책이다. 과거에는 새로운 평통 인선이 이뤄질 때마다 명단과 인적사항이 모두 발표됐었지만 지난 17기부터는 이를 아예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도대체 어떤 자질과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평통에 모여 활동을 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평통 측은 한국에서 강화된 개인정보 보호법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이유를 들고 있지만, 과거 명단 공개 때마다 있어온 분란과 시비로 골치가 아픈 상황을 면해보겠다는 의도가 크다는 지적이다. LA에서는 한 인사가 자신이 한국 조폭 출신인데 평통위원을 시켜준다는 언질을 받았다며 평통 사무실 주변을 들락거리는 일이 있었는데, 명단이 비공개이다보니 누구도 그 사람이 실제 위원인지를 확인할 수 없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까지 들리고 있다.
이미 미국내 타 지역 평통들은 현지 회장단이 자체적으로 명단을 공개하고 있다고 한다. LA 지역에서도 평통위원들의 면면을 즉시 공개해야 한다. 민감한 개인정보는 빼놓고 이름과 직업 등만 알리는 것은 법률상 문제될 것도 없다. 도대체 누가 평통에 포함돼 있는 지 알 수 없는데 어떻게 서로 힘을 합쳐 평화통일을 위한 의견을 모으고 ‘통합’을 이루는 일을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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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하 사회부장·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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