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뮤지컬 공연으로 LA가 떠들썩하다. 지난 주 할리웃 팬태지스 극장에서 개막된 ‘해밀턴’(Hamilton) 때문이다.
2015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이 뮤지컬은 지난 2년 동안 초유의 대박 신화를 새로 쓰며 미국을 열광시켜왔다. 토니상 16개 부문에 후보지명돼 11개상을 휩쓸었고, 그래미 뮤지컬 앨범상, 퓰리처 드라마 상을 수상했으며 미셸과 오바마 전 대통령 부부가 재임 시절 두 번이나 관람했다는 화제의 공연이다.
이 뮤지컬이 올해 3월 미국 투어를 처음 시작했을 때 첫 기착지인 샌프란시스코에서는 4개월간의 공연 티켓이 24시간 내에 동이 났고, 온라인 대기자가 10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두번째 도시 LA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는 12월말까지 계속되는 공연 티켓은 거의 매진 상황이고 가격은 어마어마하다. 이 뮤지컬은 매일 행운의 10달러 티켓 40장을 추첨하는데 공연 첫날 뮤지컬 창작자인 린 매뉴얼 미란다가 극장 앞에서 직접 추첨했을 때는 수천명이 몰려들어 할리웃 길이 완전 마비됐었다. 개막 일주일 전 LA 타임스는 이 뮤지컬에 관한 특별 섹션을 제작했으며 지금까지 연일 관련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왜 이 난리들일까? 도대체 해밀턴은 누구인가?
알렉산더 해밀턴(1755~1804)은 미합중국의 초대 재무부 장관을 지낸 사람이다. 영국과의 전쟁으로 빚더미에 올라있던 신생국가의 살림을 떠맡아 채권 발행, 중앙은행 설립, 워싱턴 DC로 수도 이전 등 수많은 도전과 결단을 통해 미국의 헌법제정과 재무구조의 기초를 놓았다. 대통령이 아닌데도 10달러지폐에 얼굴이 새겨져있는 ‘미국의 가장 위대한 재무장관’이다.
개인적으로도 극적인 삶을 살았다. 당시 집권층 인사들이 모두 부유층 출신이었던 것과 달리 카리브해의 작은 섬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거의 고아로 자라다시피 했다. 독립전쟁에 참전해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의 최측근 참모로 활약한 후 변호사가 됐고, 정계에 진출하여 순전히 자수성가로 ‘건국의 아버지들’ 대열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49세 때 정적이던 애론 버 부통령과의 결투에서 총에 맞아 숨지기까지 야심과 비전과 드라마로 가득했던 삶을 살았다.
그런데 뮤지컬 ‘해밀턴’이 희대의 공연으로 각광받는 이유는 단지 이 역사적 인물이 대단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뮤지컬에 대한 고정관념을 무너뜨린 신선한 스토리텔링, 독창적인 프로덕션, 그리고 힙합 뮤직으로 만든 최초의 뮤지컬이기 때문이다.
역사책 속에나 존재하던 건국의 아버지들이 무대로 걸어 나와 신나는 힙합과 랩으로 국가의 가치와 정의를 논한다. 팝, 재즈, R&B 등 장르를 망라하는 음악, 기막힌 안무와 날카로운 조명, 생동감 넘치는 연출, 현대적 감각이 반짝이는 공연 등 뭐하나 나무랄 데 없는 무대가 빠른 페이스로 돌아가니 눈과 귀가 현란하고 쉴 틈이 없다.
더 놀라운 것은 해밀턴을 비롯한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아론 버 등 백인 건국의 아버지들을 흑인과 라틴계 등 유색인종으로만 캐스팅했다는 점이다. 현대 미국을 구성하는 인종의 다양성을 의도적으로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LA 공연에서도 주인공 해밀턴 역의 마이클 루워이를 비롯해 주역 배우 모두가 흑인들인데, 사실 힙합이 흑인들 음악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자연스럽다는 평가도 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해밀턴 스토리를 기회의 나라에서 꿈을 이룬 ‘원조 이민자 이야기’로 재해석했다는 점이다. 뮤지컬을 만든 린 매뉴얼 미란다(극본, 작곡, 작사)는 푸에르토리코에서 이주해온 가족 출신으로, 해밀턴을 미국의 오리지널 이민자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뮤지컬이 나온 게 2년전인데, 현재 트럼프 때문에 분열된 미국의 상황에서 보면 미란다의 선견과 혜안이 놀랍기만 하다. 더구나 LA 공연의 개막 타이밍은 샬롯빌에서의 백인우월주의 단체 폭력사태와 맞물려 더욱 시의적절하고 긴장감 있게 다가온다.
그런데 이 뮤지컬을 보려는 한인들에게 미리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 힙합 뮤지컬이기 때문에 알아듣기가 대단히 힘들다는 것이다. 미리 유명한 수록곡들을 들어두고 역사공부도 많이 하고 갔는데도 속사포같이 쏘아대는 대사와 가사들, 엄청 많은 등장인물과 빠른 페이스로 진행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느라 적잖이 허둥댔음을 고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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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 부국장·특집 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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