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는 프랑스의 대문호 앙드레 모루아가 집필한 ‘미국사’(김영사 간)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앙드레 모루아는 신대륙 발견부터 초강대국 반열에 오르기까지, 500년 미국 역사의 장대한 드라마를 유려한 문체와 심오한 통찰력으로 풀어냈다. 신용석 조선일보 전 논설위원이 번역을 맡아 원작의 미문과 의미를 충실히 살려냈다는 평이다. <편집자 주>
-후버 대통령의 오명
후버 대통령의 임기 초에는 여전히 쿨리지 경기가 이어졌다. 주가는 상승일로에 있었고 일반 대출도 여전했으며 농가는 증산을 계속 했다. 그러나 신용을 기반으로 한 경제시장은 신용 상실의 징조가 나타나면 붕괴하게 마련이다. 1929년 10월에 시작된 공황은 과거 그 어느 경기불황보다 심각하고 장기적이었다.
1933년에 이르러 실업자는 1,300만 명에서 1,400만 명이란 파국적인 숫자에 이르렀다. 후버는 밴 뷰런처럼 ‘위기를 잉태한 국가’를 짊어졌던 것이다. 사실 그에게는 책임이 없었으나 유권자의 눈에는 모든 불행의 책임이 후버에게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는 1932년 재선에 실패했다.
후버는 월가의 사람이 아니었다. 1914년 전쟁 때 그는 청렴과 박애정신을 발휘했지만 경제공황은 그의 정치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했다. 빈곤과 실업으로 미국인은 과거 10년간 이 나라를 지배한 사람들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로버 클리블랜드 때처럼 국민은 개혁자의 출현을 기다렸다.
-불구자 루스벨트의 당선
후버의 후계자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 제32대 대통령. 역자주)는 교양은 귀족적이었으나 신조는 민주주의적이었고 정계에서 오랫동안 빛나는 업적을 쌓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가문 사람이었다. 그는 뉴잉글랜드의 명문고인 그로톤 스쿨과 하버드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어느 모로 보나 그가 불우한 사람들의 옹호자가 될 운명적 요소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정치에 흥미가 있었고 성품과 인격으로 대중의 인기를 차지하고 있던 사촌 누이 엘리너 루스벨트(부녀해방 운동가. 역자주)와 결혼해 정치적 기반을 굳혔다. 루스벨트는 중년에 소아마비에 걸려 두 다리를 자유롭게 쓸 수 없었다. 이 고난은 고생하는 사람을 이해하도록 도왔고 부자유스런 다리를 재활하기 위한 과정에서 그는 의지를 단련했다. 철제기구에 의지하지 않으면 일어서지 못하면서도 그는 뉴욕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는 용기를 발휘했으며, 지사로서 이룬 정치적 성공으로 대통령 후보가 되는 행운을 차지했다.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는 위대한 용기, 천성적인 매력과 친근감, 신인 발굴 능력, 보기 드문 정치 연설 재능 등을 보여주었다.
-공황과 파산
그러나 1932년만 해도 이 매력 있는 불구자 귀족이 미합중국 역사상 최장임기를 지낸 대통령이 되고, 미합중국을 세계 강대국 중 하나로 만들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FDR로 불리는 루스벨트가 후버의 뒤를 이어 정권을 인계받았을 때는 나라는 비극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다. 무려 1,300만 명의 실업자가 고통 속에 신음했고 600만의 농가가 100억 달러에 달하는 부채에 깔려 죽을 지경이었다. 한 신문은 농가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일곱 명의 가족이 악착같이 일해도 중고차의 기름 탱크를 채우지 못한다.”
면화는 5센트, 밀은 37센트로 폭락했다. 농민들은 채권자에게 집을 빼앗겼고 수천 개에 달하는 지방은행은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해준 채무의 상환이 불가능해 모조리 파산했다. 대형 은행의 예금자들도 불안을 느낀 나머지 앞다투어 예금을 인출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취임하는 날까지 23개 주가 지불 정지 상태에 빠져 있었다.
-제3의 방식
링컨 이후 대통령이 이처럼 극적인 역경 속에서 취임한 적은 없었다. 수백만 명의 실업자는 그 숫자가 매일 늘어났고 농민은 난동을 부렸다. 은행은 폐업하고 모든 사회구조의 지주가 무서운 속도로 하나 둘 쓰러져가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장면은 길게 늘어뜨린 성조기 뒤의 어둠 속에서나 찾아낼 수 있을 듯한 광경이었다.
이 경우 세 가지 경제정책을 예상할 수 있었다. 첫째는 고전적인 자유방임주의로 개인 활동의 성과 덕분에 정상 상태로 돌아가기를 기대하는 것이고, 둘째는 생산수단 사유를 금지하는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로 해결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셋째는 통제경제 또는 계획경제를 실시하는 것이다.
신임 대통령은 제 3의 방식을 택했고 우선 물가상승을 위해 달러를 40퍼센트 평가절하했다. 또한 일자리를 창출하고자 정부가 거대한 댐 건설부터 기념 조형물 장식에 이르는 방대한 공공사업에 착수했다. 더불어 임금 인상을 위한 단체 계약을 권장했다. 나아가 국민이 부정한 주식에 투자하지 않도록 채권 발행 은행을 엄중히 감독했고 이들의 예금 취급을 금지했으며 신설한 증권외환위원회가 이들을 감독하게 했다. 농가 구제를 위해서는 저당 잡힌 대출금의 일부를 정부가 떠안았고 부채 금리를 인하했다. 그 뿐 아니라 농산물 가격 하락을 방지하기 위해 면화와 밀의 경작 면적을 축소하도록 권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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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석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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