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忍은 글자 그대로 마음(心)을 칼(刀)로 찍어내는 것이다. 정말 어떤 대단한 분노가 치밀어도 그 것을 단칼로 찍어내듯 참는 것이다. 그것을 참을 인, 忍이라고 한다.
옛날 어느 소년이 시원한 대청 마루에 앉아 낭낭한 목소리로 글을 읽고 있었는데, 한 탁발승(托鉢僧)이 대문앞에 와서 목탁을 두들기는 것이다. 그럴때 소년의 어머니는 쌀이던 보리던 얼마만큼이라도 퍼드려 꼭 시주를 하고는 했는데 마침 어머니도 안계셔서 소년이 쌀 독에서 쌀을 퍼다가 한 웅큼 스님 시주 주머니에 넣어 드렸다.
보아하니 나이드신 스님인데 더운 날씨에 목도 마르시겠다 싶어서 “스님, 잠깐 쉬어가시면 냉수 한그릇 올리겠습니다. 우리집 우물물이 여간 시원하지 않습니다.” 탁발승은 피곤하고 목이 마르던 차에 사양않고 대청 마루에 걸터 앉아 냉수 한 그릇을 시원하게 들이키면서 소년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한 마디 했다. “심성도 곱고 머리도 좋은데 참으로 아깝다.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겠구나.”
소년이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깜짝 놀라자, 스님은 “업보(業報)인데 어찌 하겠냐 만 네가 준 시주가 고마워서 한 가지 피할 방법을 알려주겠다. 부디 명심하도록 하라” 그리고 참을 忍자 하나 써 주고는 떠났다.
소년은 참을 忍을 여러장을 써서 방문에 붙이고, 책상에 붙이고, 장농에도 붙이고, 눈에 띄는 곳에는 모두 붙여놓고 자나 깨나 ‘참을 인’을 마음에 새겼다. 세월이 흘러 소년이 장성을 해서 결혼을 하여 잘 살고 있는데, 어느날 밭 일을 하고 집에 일찍 돌아오니 아내가 어떤 녀석과 벌거벗은 채 홑이불을 덮고 누워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적으로 눈이 뒤집혀서 들고 있던 낫으로 ‘년놈’ 을 단숨에 요절을 내려는 순간 방문에 써 붙여 놓았던 글자 ‘참을 忍’이 눈에 들어왔다. 벽에도, 천정에도,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참을 忍’ 그제서야 숨을 고르고 마음을 가라 앉혔다. 알고 보니 사내로 알았던 것은 처제. 처제가 언니집에 방문은 하였는데 형부도 안계셔서, 둘이서 시원하게 우물물로 목욕을 하고 감깐 잠이 들었던 것인데 그만 처제가 머리를 말리고 감아 올려서 누워있는 모습이 언듯 남자로 보였던 것이다. 참으로 그 한순간을 안 참았더라면 어쩔 뻔 했겠는가. 한순간을 참음으로 아내와 처제 두 목숨을 구하고 살인자가 될 뻔한 자기를 구한 것이다.
2012년 4월 오클랜스 오이코스 대학에서 총기를 난사하여 7명을 살해하고 3명에게 중상을 입힌 협의로 기소되어 무려 7번 연속 종신형을 선고 받은 고수남씨는 전에 내가 운영하던 가게의 종업원이었다. 지각 한번 않을 정도로 사람이 성실하고, 예의 바르고, 인사성도 밝아서 자기보다 나이 많은 동료 종업원들에도 형님을 대하듯 항상 깍듯했다. 아버지에게도 효자여서 어느 한국마켓에서 일을 하신다는 아버지에게 전화하는 것을 옆에서 들으면 정이 뚝뚝 흐른다. “아버지…식사하셨어요? 아버지… 그러셨어요? … 아버지, 그러시지요.” 동부 어디서 마켓을 했하다가 ‘다 들어먹고’ 이혼까지 당했다는 이 사람은 그러나 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못난 아들 때문에 울 아버지 고생하신다”며 항상 울멱였다.
사건 후 신문에 난 사진을 보면서도 우리는 용의자가 우리가 아는 ‘원 고(고수남의 영어 이름)’인 줄 몰랐다. 얼마나 사납고 무서운 모습인지 우리가 아는 착실하고 수줍은 청년 ‘원 고’가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앞서 얘기한 더위에 탁발 스님에게 냉수 한 그릇을 권하는 따뜻한 심성이 한 순간의 오해로 악마로 바뀌던 것처럼 이 수줍은 청년 ‘원 고’가 그렇게 변한 것도 한 순간의 분노를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건을 듣기로는 ‘원 고’가 간호사가 되려고 오이코스 대학에 입학을 했지만 공부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서 학업을 포기하고 학교에 입학 등록금을 돌려달라고 했으나 거절을 당했다. 그러나 ‘원 고’에게는 등록금으로 낸 돈 몇 천 달러는 시급 얼마씩 받고 마켓에서 일하는 ‘불쌍한’ 아버지로 부터 빌린 기막힌 돈이었다. ‘원 고’는 돈을 돌려 달라고 사정을 하고 경리 담당자는 당연히 교칙에 따라 안된다고 거절을 하고, 그러다가 감정이 격해져서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을 저지른 것이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은 인간의 기본 감정이다. 손뼉치며 기뻐할 수도 있는 반면에 얼굴 붉혀 화를 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 Erich S. Fromm)은 사람이 노(怒)하는 것은 기뻐하는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다. 한 마디로 怒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그 순간을 잘 관리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잠 16:32)고 하셨다. 노를 내어도 순간을 참아서 노를 더디 내고, 노를 내어도 죄는 짓지 말 것이다. 죄의 댓가로 ‘원 고’는 7번 연속 종신형이란다. 죽고 살기를 7번 해서 각 生마다 무기징역을 살아야 한다는 말인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 순간만 참아 노를 더디했더라면 또 다른 해결 방안이 나오는 것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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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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