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는 프랑스의 대문호 앙드레 모루아가 집필한 ‘미국사’(김영사 간)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앙드레 모루아는 신대륙 발견부터 초강대국 반열에 오르기까지, 500년 미국 역사의 장대한 드라마를 유려한 문체와 심오한 통찰력으로 풀어냈다. 신용석 조선일보 전 논설위원이 번역을 맡아 원작의 미문과 의미를 충실히 살려냈다는 평이다. <편집자 주>
-윌슨 대통령의 중립
1914년이 되었을 때 남북전쟁은 거의 잊혔고 근 10년간 미합중국은 눈부신 번영을 만끽해왔다. 국민은 인구와 부가 늘어나는 것을 직접 느끼는 동시에 루스벨트나 윌슨 같은 개혁자가 정치를 이끌었으므로 앞으로도 계속 번영할 것이라고 믿었다.
미국인은 왜 유럽이 시대에 뒤떨어진 잔인한 전쟁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특히 평화주의자들은 선전을 통해 평화 이념들을 강화했다. 1914년 8월까지만 해도 미합중국이 앞으로 유럽 대전에 참가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고 하물며 참전이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윌슨 대통령은 중립을 지지했고 도의적 이념에 입각한 강대국으로서 모범을 보이고자 했다.
-영국이냐, 독일이냐
하지만 프랑스와 영국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바로 지금 이 두 나라가 평화와 친선을 지키려고 온 힘을 바치고 있는 게 아니냐고 응수했다. 1914년 윌슨은 이 말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미합중국의 중립을 선언하고 국민에게 사상적, 행동적으로 중립을 지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비판적 언사를 삼가도록 요망했다.
“미합중국은 무력행사를 거부하는 강국의 시범이 되어야 한다. 전쟁은 교전국의 도의를 추락시킨다.”
더불어 그는 자신이 열성을 기울여 추진하는 국내 개혁도 평화 상태가 아니면 달성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훗날 그는 그 전쟁의 진정한 의미를 착각했음을 인정하고 1919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우리는 멀리 떨어진 아메리카에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무슨 음모가 잠재하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윌슨은 혈통과 문화의 흐름에 따라 자신의 의사와는 달리 급속히 연합국 측으로 기울었다. 좋든 싫든 윌슨은 영국의 전통을 따랐고 또 그에게는 독일보다 영국의 주장이 이해하기가 쉬웠다. 철저한 평화주의자였던 국무장관 브라이언은 대통령이 편파적으로 연합국 측을 지지한다고 생각했지만 연합국 측의 여론은 그렇지 않았다.
-독일의 잠수함과 기뢰작전
중립을 지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미합중국은 이것을 나폴레옹 전쟁 때 뼈저리게 경험했다. 1914년 영국은 다시 한 번 추밀원령으로 독일에 대한 모든 통상을 전면 금지한다고 선언했다.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영국해협과 북해를 군 작전구역으로 선언했다. 이 조치로 막심한 타격을 받은 아메리카의 무역업자는 수차례나 강경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이 항의는 아무런 효과도 기대할 수 없었다. 대통령도 국무성도 연합국을 위해 참전할 의사가 없었고 연합국도 이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은 영국의 봉쇄작전에 맞서 국제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대응했다. 적어도 봉쇄는 중립국의 인명 손상을 초래하진 않았으나 독일의 잠수함과 기뢰 작전은 순식간에 적지 않은 미국인의 생명을 앗아 갔다. 윌슨은 미합중국 국민의 생명과 재산 손실에 대해 독일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 조치는 독일에 급격히 적의를 보이던 일반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주미 독일 대사는 미합중국에서 벌인 독일 홍보 활동이 이것으로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음을 시인했다.
-미국의 호황
얼마 후 미합중국은 연합국에 식량과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해상권을 장악해 물자 수송이 가능한 프랑스와 영국은 미합중국의 공업제품을 구입하는 중요한 고객이 되었다. 덕분에 미합중국은 때 아닌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독일이 일방적인 지원에 항의하자 미 합중국은 연합국이 해상권을 확보하고 있는 이상 이 사태를 미합중국이 책임질 필요는 없다고 답변했다. 사실 미합중국의 수출품 중 일부는 중립국을 통해 동맹국 측으로 유출되고 있었다.
물자 구입과 수송에는 대금지불이 필요했다. 프랑스와 영국은 초기에 보유하고 있던 미합중국 증권을 매각해서 충당했고 이후에는 차관으로 결산했다. 브라이언은 차관을 반대하는 한편 교전국에 대한 민간은행의 융자는 허용했다. 그 무렵에 유포된 낭설과 달리 이들 민간은행이 미합중국이 참전하도록 압력을 가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무근이다. 1915년 9월 미합중국은 연합국을 위한 공채를 발행했고 미 합중국이 참전하기까지 그 액수는 15억 달러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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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석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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