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수필집 <불타는 숲>을 낸지 16년만에 <안개의 천국>을 출간했다. 내심 첫 작품 보다 나은 글을 쓰려고 긴 세월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1집 때처럼 누르고 눌러도 가슴 깊은 데서 용솟음치는 글들을 쓰지 못했다.
세월 가면서 한국일보에 매달 발표된 칼럼들이 백 수십여 편 차곡차곡 고였다. 고인 글들을 엮지않으니 점점 퇴색해갔다. 어느 날, 첫사랑같은 첫 책보다 나은 글을 바라는 건 과욕임을 깨달았다. 결국 부끄러운 대로 추려낸 글들로 2집을 엮기로 했다.
<안개의 천국>은 혼과 몸을 바쳐 살아온 샌프란시스코의 메타포다. 평생 내가 사랑한 세 가지, “환경과 글과 사람”의 이야기를 담았다. 생각하면, 지난 30여년 간. 세계적 미항인 샌프란시스코만의 수질(水質) 관리가 내 천직이었다. 글, 또한 “환경과 삶” 이란 칼럼을 통해 생태계 문제와 이민의 삶에 관한 담론을 많은 독자들과 나누었다.
그리고 고락을 같이한 식솔들, 소중한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는 내 삶과 글의 중심이었다. 하 세월 흘러도 사람간의 인연은 애중할 가치가 있음을 믿는다. 시간과 공간은 결코 인간을 넘어설 수 없음을 믿는 휴머니스트의 심장으로 살아왔다.
<안개의 천국>에 수록된 글들 중에서 몇 구절들을 추렸다. 부족한 글을 아껴주신 독자들과 나눔으로 감사 인사를 대신하고 싶다.
■ “명왕성이 보낸 연서(戀書)” 중에서
우주의 가장 큰 법칙은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다. 별들이 수없이 명멸하고 원자의 수가 증감해도 총량 에너지는 변하지 않는다. 빛의 속도나 만유인력 상수, 전자의 전하 등도 변하지않는다.
우주의 법칙은 작은 눈으로 보면 모든 게 변하나 큰 눈으로 보면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조물주의 섭리도 그럴 것이다. 그 섭리를 이해하고 탐험선의 운행에 운용하는 것이 과학이요, 그 섭리를 인간관계에 적용하는 것이 사랑일 것이다.
■ “여행은 버림이다” 중에서
여행은 버림이다. 버리기 위해 떠나란 말이다. 무언가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 부산스레 떠났던 나를 버리라는 말이다. 삶에 찌들어 여유 없이 살아온 나를 보헤미안 시골길을 지나며 훨훨 날려보내라는 것이다.
집시처럼 떠나자. 여행은 감성을 열고 느끼는 것이다. 잠시 머무는 곳에 내 사연을 심는 것이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 그 사람들의 사정에 귀 기우려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내 선입견과 자만심을 버리는 것이다. 여행은 내가 있어야할 곳에 결코 없는 것이다.
■ “아버지의 뒷모습” 중에서
뒷모습은 속일 수 없다. 아무리 두껍게 화장을 한들 거짓말을 못한다. 그래서 뒷모습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속까지 알고 있음을 뜻한다. 뒷모습은 너무 정직해 슬프다. 늙어가는 부모님의 뒷모습은 더욱 그렇다.
어느 아버지가 세 아들에게 각각 동전 닷 냥을 주면서 방을 꽉 채우라고 했다. 첫째는 투덜거리며 건초 더미를 사다가 방을 채웠다. 둘째는 솜을 부풀려 밀어 넣었다. 그러나 셋째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저녁 한끼를 대접하고 남은 돈으로 양초 한 자루를 사다가 방을 환하게 비추었다.
첫째와 둘째는 눈앞의 이익이 박한 현재가 못마땅해 눈가림만 했다. 이들에게 현재는 짐일 뿐이다. 그러나 셋째는 이웃을 배려하며 현재를 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카르페디엠”은 오늘을 감사하는 자들에게 내리신 하늘의 지혜다.
■ “가속도의 힘” 중에서
분명히 가속도는 속도와 다르다. 이 시대의 가장 불행한 일은 속도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인 양 항상 쫓기듯이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피곤하다. 반면에 가속도는 목표에 정확히 착지하기위해 적용하는 역동적인 삶의 요소이다.
속도가 남을 이기려는 동물적 본능에 바탕을 둔 일차방정식이라면, 가속도는 삶의 법칙을 이해하고 기본에 충실하려는 지혜로운 인간이 푼 미적분 방정식과도 같다. 가속도는 자연스럽고, 겸허하고, 절제력있고, 균형 잡힌 삶의 자세에서만 나온다. 그래서 인생은 무모한 속도전이 아니라 방향이 뚜렷한 가속전이요, 억지가 아니라 자연스런 궤도에서 발휘되는 다이나믹스다.
■ “안개의 천국” 중에서
그대는 샌프란시스코 도심으로 스미는 안개의 모습을 본 일이 있는가? 저녁 무렵, 트윈 픽 등성이를 넘어오는 안개 사단의 진군(進軍)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금문교의 두 첨탑이 거대한 안개의 베일에 휘감겨 구름 기둥처럼 하늘을 떠가는 광경을 목도한 일이 있는가?
샌프란시스코의 8월은 안개의 천국이다. 그대가 이곳에 오면 우선 먼발치에서 안개를 바라볼 일이다. 둥근 잔에 붉은 포도주를 가득 채운 채 안개가 급류의 강을 만들고, 혹은 천천히 성을 쌓는 모습을 주시할 일이다. 그래도 못내 그리우면 금문교에 서서 안개의 강에 발을 담그고 하늘 틈새로 명멸하는 별들을 올려다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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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봉 (수필가,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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