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에 대학교 40년 후배 두 명을 만났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지 36년 밖에 되지 않았으니 엄밀히 따지면 아직 40년 후배는 아니다.
올해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입학하는 그들이 앞으로 4년 후에 대학을 졸업하면 나 한테 40년 후배가 된다는 얘기이다.
동료 교육위원으로부터 자신의 지역구에 위치한 한 고등학교에서 올해에 두 명이 내가 졸업한 대학에 진학하는데 아침식사라도 같이 하지 않겠느냐고 연락이 왔다. 두 학생들 모두 소수계 출신인데 내가 학교 선배로서 경험담을 나누어 주면 좋을 것 같다면서 말이다. 오래 전 나의 경험이 과연 무슨 도움이 될까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어린 후배들을 격려라도 해주고 싶어 토요일 아침에 시간을 냈다.
그런데 둘 중 한 명은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학생이고, 다른 한 명은 6형제의 막내인데 부모님들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서 거주하고 있고 자신은 이 곳에서 형제들과 같이 살고 있다고 했다. 여섯 살 쯤 미국에 왔기에 영어에는 지장이 없으나 부모님들과 떨어져 형제들과 살면서 생활 형편이 녹녹하지 않은 모습이 보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보이는 그 학생은, 그 날 아침 식사를 두 명의 교육위원 그리고 학교 교장 선생님과 컨트리 클럽에서 하는 것이 신경 쓰였는지 윗옷을 새 것으로 사 입고 나온 듯 했다. 그런데 제대로 집에서 챙겨 주는 어른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 보였다. 옷을 포장에서 풀은 후 미처 다리미질을 못해 포장에 접힌 주름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게 보였던 것이다.
바로 전날 밤에 급하게 사 입은 것 같았다. 불현듯 내가 한국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맨 처음 미국에 이민왔던 때가 생각났다.
고등학교 시절 미국으로 이민 오기 전 한국에서 살 때 나에게는 변변하게 입을만한 사복이 없었다. 평소 학교나 교회에 갈 때는 교복을, 그리고 집에서는 대충 체육복이나 교련복을 입었다. 미국에 오기 직전이 되어서야 겨우 사복이 한 두 가지 생겼다. 미국에 와서도 처음엔 옷을 제대로 사 입을 형편은 못 되었다. 아주 저렴한 가게나 헌 옷 가게에서 구해 입었다.
한 번은 급우 한명이 내가 한국에서 가지고 온 연두색 윗도리를 매일 학교에 입고 오자 나에게 너는 옷이 하나 밖에 없냐고 물었다. 그 친구는 내가 그 옷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일부러 계속 그 옷만 입는 줄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사실 나에게는 그 옷 밖에 입을만한게 없어 더러워지면 바로 빨아 다음 날에도 그대로 입고 갔었던 것이다. 미국에 와서 체중이 제법 늘어 옷이 몸에 꽉 껴도 그 옷을 계속 입을 수 밖에 없었다.
또 한 번은 학교 친구들 몇 명이 사전 연락 없이 당시 내가 살던 아파트에 찾아 온 적이 있었다.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던 백인 친구들이었는데 내가 한 번도 그들을 내가 사는 곳으로 초청해 본 적이 없기에 궁금해서 그랬던 것 같았다. 그 때 사실 나는 상당히 당황했다. 누추하게 살던 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싫었다. 결국 친구들을 집 안으로 불러 들이지도 못하고 문 밖에 서서 얘기하다 보냈던 기억이 있다.
아마 그 친구들도 내가 맨 처음 현관문을 열었을 때 내 어깨 너머로 어렴풋이 보였을 리빙룸의 모습에 적잖이 놀랐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한다. 헌 소파 한 세트와 소파 뒷 쪽으로 침실이 충분하지 않아 잠자리로 사용하는 침대가 놓인 것을 봤을 것이다. 게다가 그 때에는 요즈음처럼 이민자들도 많지 않았기에 이민자 가족들의 생활 모습이 자신들과 많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그 친구들도 잘 몰랐을 것이다.
40년 후배들에게, 특히 가난한 이민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후배에게 대학에 가서 의기소침 하지 말고 공부하라는 얘기를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과거에 기죽었던 일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대학 생활을 좀 더 활발하고 유익하게 보내지 못했던 경험담들을 이야기 해 주었다. 때로는 진지하게 그리고 때로는 웃어가면서 내 얘기를 듣는 후배들을 보면서 나도 이제 확실히 말 많은 대선배가 된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문일룡 변호사>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