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신천군 문화면 동각리 167번지. 엄마의 고향 집 주소이다. 문화골이라고 불리던 동네였다. 봄마다 앞산은 바위까지 진달래꽃으로 뒤덮여서 꽃뫼산이라 했고 꽃뫼산 앞으로는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시내가 흘렀다.
문화골에서 오십리쯤 북쪽에는 그 유명한 구월산이 있었다. 구월산에서 제일 큰 절 주지 스님의 딸이 엄마와 한 반이던 덕분에 엄마는 방학에는 구월산에 놀러 가서 절밥을 먹으며 피서를 했다고 한다. 오빠와 내가 아직 어렸을 때 우리가 이모라고 부르던 엄마의 고향 선배 한 분은 우리를 보며 “야야 니들은 보통사람 아이디, 고럼, 구월산 가랑잎 썩은 물의 정기를 받은 사람들이니끼니, 멩심하라우”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이북 사투리도 그렇고 가랑잎 썩은 물이라니 어딘가 웃음이 나게 하는 말이었지만 어린 나이에도 구월산이 무척 특별한 산인가 보다 하며 그 산과 내가 관련이 있다니 괜스레 으쓱해지기도 했었다.
문화골은 꽃뫼산이외에도 아담하고 아름다운 산들이 주위에 둘려있고 산 아래에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몇 개의 작은 동리들을 이루고 있었다. 그중의 한 동리인 왕산리 사람 중에 넋이 나간 남자가 있어서 사람들은 그 남자를 왕산리 도깨비라 불렀다. 엄마가 들려주신 고향 얘기 중에 나는 이 왕산리 도깨비의 이야기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문화면장 누이의 외아들이던 남자는 어렸을 때부터 인물이 훤했다고 한다. 그가 장성한후에 어떤 연유로 정신을 놓아버렸는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상사병에 걸려서 그렇게 되었다는 소문만 자자했다. 그가 길 위에 나타나면 허방을 딛는 듯 위태한 걸음걸이 때문에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고 했다. 머리는 까치집을 얹은 형상이었고, 종일 산으로 들로 헤매고 다니다가 아무 데나 누워 자는 까닭에 머리카락 사이에는 짚풀들이 묻어 있었다. 얼굴엔 땟국이 줄줄 흐르고 겹겹이 껴입은 누더기들이 남자의 몸을 산처럼 커 보이게 했다. 무서운 그 모습이 나타나면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까지 왕산리 도깨비다!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기 바빴다고 했다.
그런 왕산리 도깨비를 일정한 거리에서 한결같이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사람이 있었다. 몸이 너무나 왜소하고 마른 여인이었다. 누더기 같은 한복 치마를 허리에 동여매고 턱이 목 아래에 닿도록 기역자로 고개를 숙인 채 겅중겅중 걷는 남자의 뒤를 저만치에서 종종걸음으로 따라오곤 했다고 한다. 그 여인은 왕산리 도깨비라 불리는 남자의 어머니였다.
산발하고 온종일 산지사방을 헤매다니는 미친 남자가 바로 분신과도 같은,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그 어머니…“글쎄 그게 그 왕산리 도깨비의 엄마야.”하시며 엄마는 이 부분을 얘기할 때면 말끝이 떨리면서 눈물을 참느라 눈을 크게 뜨고 얼굴을 일그러뜨리곤 하셨다. 처음에는 도시락을 들고 쫓아 다니며 때가 되면 밥도 먹이고 밤이 되면 집으로 데리고 와서 씻기고 재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계절이 여러 번 바뀌어도 아들의 정신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런 아들을 따라 다니다 보니 멀쩡했던 그 어머니도 결국에는 구걸을 하게 되고, 아무 데서나 잠을 자게 되고, 점점 아들처럼 도깨비 형상이 되어간 것이라 했다.
사랑하는 아들, 불쌍한 아들, 집에서 너무 멀리 떠나온 아들, 미쳐서 돌아버린 아들이지만, 그래도 그 아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엄마라면, 아들과 함께 도깨비가 되는 것 말고 그 시절에 무슨 다른 뾰족한 수가 있었을까. 나 자신, 엄마로서 그때 저 어머니의 자리에 선다면 나 역시 도깨비 모양이 될지언정 그렇게 아들의 뒤를 쫓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길게 늘어뜨린 머리를 싫어하셔서 늘 내 긴 머리를 묶으라고, 핀을 꽂으라고 하셨는데 말 안 듣고 풀어 헤치고 나가는 뒤통수를 향해 “꼭 왕산리 도깨비 같다!”며 소리치곤 하셨다. 엄마는 1.4 후퇴 때 고향을 떠난 이후 다시 고향에 돌아가시지 못하고 이제 문화골에 살던 어린 소녀의 정신연령이 되어 계신다. 왕산리 도깨비 모자의 이야기도 거의 한 세기 전의 일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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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진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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