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에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나와의 약속이 깨졌다. 부동산 매매일은 시간이 자유로운 반면 매매자의 편의를 위해 그 시간을 맞추게 되고 그러다 보니 내 나름대로 일에 대한 규칙을 정해 일정 시간은 제외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날밖에 시간이 없는 외국인 집 구매자로 인해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을 운전하며 약속 장소로 갔다. 낯이 익은 길이다. 문득 이십여 년 전에 이 근처에 있는 공원에서 혼자 해피 아워 (happy hour)를 하던 때가 생각이 났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동료들과 직장 근처의 바 (bar)에 들러 가볍게 술 한잔을 걸치며 그날의 스트레스와 피로를 씻는 시간을 해피 아워라고 한다. 나는 두 아이가 아직 초등학교 다닐 때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 한적한 공원에 가끔 들러 하루의 피로를 씻었다. 새벽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며 아이들을 챙겨 허겁지겁 학교에 데려다주고 종일 일 하다가 집에 돌아올 때가 되면 심신이 녹초가 되었다. 일하며 아내, 엄마, 며느리로 일인 사역 혹은 오역으로 분초를 아끼며 살던 때 나는 나만의 시간에 늘 목이 말랐다. 그러던 중에 주차장을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축구장과 정구장 그리고 어린이 놀이터가 있는 넓은 평원이고, 다른 한쪽에는 숲이 있는 이 공원을 발견했다.
이곳에 와서 어떤 때는 미처 차에서 내리지도 못한 채 가쁜 숨을 고르며 차 유리창 밖을 내다 볼 때가 있었다. 텅 빈 축구장을 먼발치서 바라보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넓은 하늘에는 하얀 구름 돛단배 한 척이 평화롭게 정박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 평온한 정경에 담겨 있다 보면 세상이 다시 좋아져 보였다.
그곳에서 덤덤히 먼 산 보듯 나를 보던 무색의 낮달과 들판을 가로지르며 뛰어 나오는 작은 토끼 모습을 보며 잠시나마 휴식을 취했다. 집에 돌아가 저녁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그때 나에게는 큰 호사였다. 나는 아끼는 초콜릿 케이크의 마지막 한 조각을 먹듯이 그 짧은 쉼의 마지막 일 분 일 초까지 음미했다.
운이 좋아 조금 시간이 있으면 공원 숲길을 걸었다. 한여름 우거진 나무로 인해 어둑한 숲은 다른 세상처럼 고요했고 습진 냄새는 나를 아득히 먼 곳으로 데려갔다. 폐 깊숙이 숨을 들이마시며 불쑥불쑥 삐져나오는 쓸데없는 생각을 고개를 돌이질 하며 단호히 쳐내던 시절, 숲길을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나오면 유유히 창공을 누비는 매가 보였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피곤으로 까부라지던 심신에 새 힘이 서서히 생기는 것을 느꼈었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 엄마! 소리치며 나를 반길 그 해맑은 아이들을 마주하고 껴안기 위해 황급히 집으로 운전하곤 했던 기억이 새롭다.
고객과의 일을 마치고 오랜만에 다시 그 공원에 갔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나니 비가 그쳤다. 시계를 보니 교회 예배 시작 시각에 맞추어 가려면 시간이 빠듯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하고 차 문을 열고 나왔다. 순간 주차장에 다섯 그루 묘목이 제법 둥치가 굵어진 것이 보였다. 아, 그렇구나. 그때 가느다랗고 여리기만 했던 나무는 두 세대를 거치며 깊숙이 뿌리를 내렸고 내 두 아이도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이십여 년 동안 일어나야 할 일은 대부분 일어난 듯하고 거쳐야 할 일도 제법 거친 듯하다. 내 일상은 그때 비해 덜 분주하다. 돌이켜보니 내가 꿈꾸던 그 길에서 지금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수시로 나를 넘어뜨리고 상처를 준 울퉁불퉁한 길, 힘들다고 거부하다 쓰러진 그 길에서 발에 챈 하찮은 돌을 다시 보게 되었고 자잘한 꽃이 피워내는 향기를 맡게 되었다. 어느 길도 바르다 그르다 할 수 없는 것은 내가 걸어온 이 길이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이리라.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고 세월은 나를 가르친다.
요즘은 퇴근길에 직장 근처의 파네라 빵 카페에 가끔 들른다. 가게의 번잡함을 마다치 않고 구석 통유리 창가에 앉아 책 속에 호젓이 몰입한다. 창밖으로 계절 따라 흩날리는 눈과 쏟아지는 소나기 그리고 세상을 가득 채우는 연둣빛에 감탄하며 일과를 마친 달콤한 피곤함에 젖는다. 그때와는 또 다른 나만의 해피 아워다.
<
박현숙 워싱턴문인회>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