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빅토리호’ 탑승 이지연 여사
▶ 긍정적인 생각이 이겨낸 피란민 생활, 피아노 연주가 선물한 또 다른 인생
흥남철수 당시 미군장교의 도움으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탑승해 거제도 64야전병원 고현 수용소로 왔던 이지연 여사가 당시 사진들을 보여주고 있다. <황두현 기자>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 인생은 변하죠”
웅성거리던 사람들 속에서 함흥 만세교만 쳐다보던 단발머리 소녀는 지프차를 타고 지나가던 미군 장교의 눈에 띄어 ‘기적의 배’를 타고 거제도로 내려오면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눈보라가 휘날리던 흥남 부두에서 영문도 모른 채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탔던 이지연(83) 여사의 잊지 못할 기억이다.
지난 14일 본보(C13면)에 “흥남철수 작전은 맥아더 사령관이 지시했다”는 제목으로 게재된 메러디스 빅토리호 상급선원 로버트 러니의 회고를 접한 이 여사는 아들 이의성 교수를 붙들고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첫 해외 순방으로 미국에 도착하는 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먼저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찾아 헌화를 한다는 소식에 이 여사는 그 시절을 함께 보냈던 은인 같은 존재들이 그리워졌다. ‘혹시나 만날 수 있을까’ 싶어 빛 바랜 사진들을 들고 본보를 찾은 이 여사가 풀어놓은 이야기 보따리는 영화 ‘국제시장’보다 더한 기적의 연속이었다.
■ 지프차가 데려온 흥남 ‘메러디스 빅토리’호
“여학교 시절이니까 열 다섯이죠. 그 때 나는 모차르트 콘체르토 피아노 연습을 하고 사촌이 켜는 바이얼린 반주도 해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두툼한 오버코트를 입고 어린 소녀 둘이 우두커니 서있으니 미군 장교들 눈에 띄었나봐요. 여기서 지금 뭐하냐고 얼른 차에 올라타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올라탄 지프차가 우리 둘을 흥남부두에 정박된 빅토리호의 화물선으로 데려간 거죠. 그렇게 가족과 헤어진거죠...”
텅텅 빈 화물칸에 내린 두 소녀는 두리번거리다가 살살 기어 갑판으로 올라갔고 그제서야 상황을 알게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였던 장진호 전투 직후였다. 연합군이 함경남도 흥남에 도착해 군함에 군인과 민간인을 태워 흥남을 탈출했던 그 시절 피란민 1만4,000여명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탑승하게 된 것이다. 두 소녀는 매서운 추위를 견디고자 따스한 굴뚝을 찾아 몸을 숨긴 채 가만히 앉아 있었고, 그 때 식당 유리문 너머로 요리사로 보이는 미국 여성이 그들을 발견했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소녀들에게 다가와 빵과 과자를 쥐어주며 자초지종을 물어왔다.
“어머니도 없고 옷 가방도 없고 바이얼린만 손에 쥔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을 거에요. 근데 그 때 배가 움직이기 시작한 거죠. 두려움에 떨던 사촌이 울기 시작하니 그 여자분이 바이얼린을 켤 줄 아냐고 한번 해보라고 했어요. 사촌이 멋지게 바이얼린 연주를 끝내고 나니 ‘메리 크리스마스’ 하며 어깨를 툭툭 쳐주면서 한지에 싼 콩가루 엿을 건네주더라고요”
온 가족이 모이는 크리스마스 이브, 두 소녀는 가족과 헤어져 거제도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이 여사는 64야전 병원 고현수용소에서 피란 생활을 시작했고 함께 빅토리호에 탑승했던 사촌마저 병약함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홀홀단신이 되었다.
■ 음악이 선물한 또 다른 인생
막막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오후 장교 식당에 놓여있는 피아노를 발견한 그는 자신도 모르게 피아노 앞에 앉아 ‘다뉴브강의 왈츠’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에 웅성웅성 사람들이 모여든 것도 모른 채 연주를 끝내자 그녀의 뒤편에서 야전병원 원장과 간호원장, 한국인 통역의 대화가 들려왔다.
“원장이 치과의사였는데 첼로를 연주했었다며 피아노를 치는 내게 격려를 해주었어요. 그리고 ‘내일 아침 막사로 오라’고 해서 찾아갔더니 간호원장이 하고 싶은 게 있냐고 묻더군요. 무조건 ‘학교에 가고 싶다’고 말했죠”
그 다음날 간호원장은 밀봉한 봉투와 배낭 하나를 주면서 거제면 천주교 성당의 박신부에게 그녀를 보냈다. 그의 예술적 재능 ‘음악’이 두 번째로 인생을 열어준 것이다. 그렇게 마산 성지여자중·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죽을 힘을 다해 학업에 정진한 이 여사는 여고를 졸업하는 날 간호원장이 건넸던 밀봉한 봉투를 뜯어보았다. 빳빳한 20달러짜리 지폐 5장이 들어있었고 그 길로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간호원장과 계속 연락을 주고 받은 신부님의 도움으로 서울 생활이 시작됐고 같은 고향인 함흥 출신의 이문호씨를 만나 서울에서 결혼을 했다.
■ 긍정적인 생각이 이겨낸 삶
이 여사의 남편은 당시 영도유격부대 대원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비밀리에 활동하던 특수군사훈련을 받은 ‘영도유격부대’는 한국전쟁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북한 지역에서 활동할 의도로 함경남도, 함경북도와 강원도 북부 출신 청년들을 주로 선발했다고 한다. 약 1,200명의 부대원을 부산 영도 태종대와 일본 가나가와현에서 특수부대 훈련시켜 북한 후방에 공중, 해상침투해 요인을 암살하고 군사시설을 폭파와 군사정보 수집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한국전쟁 막바지까지 900여명이 북한에서 활약했다. 휴전 마지막까지 영도 태종대로 살아 돌아온 대원은 33명에 불과했다는 바로 그 영도유격부대 용사 출신인 자랑스런 남편과 함께 이 여사는 베트남, 방콕, 이란, 런던 생활을 거쳐 1980년 미국에 정착했고 2013년 고인이 된 남편을 국립묘지 이천호국원에 안장하기까지 늘 함께 열심을 다해 살았다.
“우리처럼 흥남철수로 피란민 생활을 한 사람들은 모두 영화 ‘국제시장’과 비슷한 삶을 살았어요. 이북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했고 타향 생활이 쉽지 않았죠. 그래도 그 누구보다 강인한 정신력과 의지가 우리를 베트남에 가게 했어요. 자식들은 우리에게 정말 힘들게 고생하며 살았다고 하지만 늘 감사함이 앞섭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무엇이든 이겨나갈 수 있어요”
<
하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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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총 1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빅토리호 레너드 선장은 전쟁 후 뉴튼 세인트 폴 수도원의 마리너스 수사가 되셨습니다. 당시 한국의 검은 바다 위에서 하느님의 손길이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메시지가 전해졌다고…. 신앙인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고백이죠..(공지영의 수도원 기행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