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전 미국으로 이민 올 때 가져온 조각보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미국으로 한번 떠나오면 왕래가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어머니께 당신을 추억할 만한 물건을 무엇이든 달라고 했더니 비단 조각보 3점을 싸주셨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웠지만 미국에 온 후에는 딱히 용도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장롱서랍 밑바닥에 들어박히고 말았다.
이사할 때면 짐을 싸고 풀면서 한 번씩 펼쳐 보는게 다였고, 다시 장롱 속으로 들어가면 몇년씩 꼼짝 없이 눌려있느라 접힌 자국이 펴지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훗날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조각보는 진짜 유물이 되어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3년 전 라크마(LACMA) 보자기 웍샵에 초청된 보자기 전문가 이영민씨를 취재하러 나서는데 갑자기 그 조각보 생각이 났다. 어디 있더라, 기억도 가물가물 했지만 열심히 뒤져서 찾아내 들고 갔다.
취재가 얼추 끝났을 때 쭈뼛거리며 “저도 이런게 있는데요” 하며 꺼내보이자 이영민씨가 반색하며 눈을 빛냈다. 찬찬히 살펴보더니 “요즘에는 찾아보기 힘든 아주 귀한 조각보니 잘 간수하라”고 당부한 그녀는 클래스에 참석한 외국인들에게 들어 보이며 “이게 바로 진짜 한국의 전통 실크 조각보”라고 소개했다. 탄성이 터져 나왔고, 다들 다가와 만져보고 사진들을 찍느라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그 조각보는 나의 외할머니가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전에 만드신 것이다. 일본강점기에 외할아버지가 중국 비단을 무역하는 포목점을 하셨는데 바느질 솜씨가 뛰어난 할머니는 거기서 나오는 천 조각들로 수많은 천 공예품을 만드셨다고 한다. 그러니 외딸인 어머니를 시집보낼 때 혼수가 얼마나 화려했을지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의 조각보는 그 중에서 아주 하찮은 천 쪼가리였다. 좋은 것은 전쟁 통에 다 사라졌고, 일부는 엄마가 피난 갈 때 이고 가서 시골 처녀들에게 팔아서 근근히 생활하셨다고 했으니, 내가 이민 올 때까지 남아있던 조각보들은 볼품도 쓸모도 없어서 먼저 시집간 언니들 눈에도 띄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세월이 흐르고 미국으로 건너오니 아주 귀한 몸이 된 것이다.
잘 간수하라는 말을 전문가로부터 듣고 난 후부터 작은 고민이 시작되었다. 나로서는 결국 다시 잘 싸서 넣어두는 일밖에 할 수가 없었다. 액자를 해서 걸어놓을까도 생각했지만 직물은 세월이 지나면 삭아서 원형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도달한 결론은 믿을만한 박물관에 기증하자는 것이었다. 뮤지엄에서는 텍스타일 전문가들이 보존처리를 할 것이고, 적정 온도와 습도의 수장고에서 보관할 것이며, 가끔은 전시를 통해 한국인의 미감과 예술성을 보여줄 수 있을 테니 내가 갖고 있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렇게 조각보들을 샌프란시스코의 아시안 아트 뮤지엄으로 시집보낸 것이 올해 초, 지금은 한국미술 갤러리에서 귀한 대접을 받으며 셋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아시안 아트 뮤지엄에 기증한 이유는 그곳이 미국에서 가장 큰 아시안 미술관이고, 특별히 한국 보자기미술 전문이기 때문이다. 또한 수년전 라크마의 한국미술 큐레이터였던 김현정씨가 그곳에서 활약하고 있는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물론 뮤지엄에 기증 의사를 밝힌다 해도 무조건 다 받는 것은 아니어서 전문부서의 검증과 연구를 거치고 여러 절차를 지나서 기증이 완료되기까지 1년여의 시간이 소요됐다. 뮤지엄 측에서는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한국 조각보들과 완전히 다른 종류의 작품이라면서 기증이 끝난 즉시 전시를 결정했고, 지금은 거기에 새겨진 도안과 글자 등을 통해 미개척 분야인 조선 후기 직물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지난달 뮤지엄을 방문해 조각보들이 걸려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의 감격은 참으로 표현하기 힘들다. 어머니를 다시 만난 듯 반가웠고, 한번도 뵙지 못한 할머니가 자랑스러웠다. 무엇보다 기뻤던 건 평생 집밖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뛰어난 작품들을 창조했던 조선말기의 한 여성, 나의 외조모 장수자(1896-1951)의 이름을 찾아서 뮤지엄에 남겼다는 사실이다.
집안에 널려있고 굴러다니던 옛 물건들이 생각난다. 그 중에서 보자기 석 점이라도 들고 온 것이 미국 속의 한국문화 알림에 아주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게 됐다. 지금 다들 한번 장롱 서랍을 열어보시기를. 이민 짐 가방 속에 넣어온 물건 중에 다음 세대에 전해줄 보물이 들어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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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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