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선거가 끝나는 순간 또 하나의 선거가 시작된다”는 워싱턴의 속성은 기성정계 풍토를 조롱해온 ‘아웃사이더’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에게도 무시하긴 힘든 현실인 듯하다.
트럼프가 선거 유세 때처럼 아직도 ‘기후변화는 가짜’라고 믿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어떻게 믿든 상관없이 지난주 발표한 파리기후변화협정 탈퇴 결정은 기후에 관한 게 아니다. 발표 연설에서 파리협정이 미국 경제에 끼칠 ‘엄청난 부담’에 대해 열변을 토해냈지만 일자리와 경제와 관한 것도 아니다. 석탄산업의 하락세와 일자리 감소는 사실이어도 탄소배출 규제보다는 값싼 천연개스와의 경쟁에서 밀리고 생산자동화로 인력을 감축했기 때문이다.
파리협정 하에서 미국의 약속은 194개 다른 국가들의 약속과 마찬가지로 자율적인 것이다. 감축량을 조정할 수도 있고 무시해버릴 수도 있다. 목표 달성을 못했다고 벌칙이 가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바마 지우기’가 목적이라면 오바마의 약속내용을 대폭 수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왜 ‘탈퇴’라는 무리수를 둔 것일까? 다음 선거 때문이다. 6월 첫날 로즈가든에서의 탈퇴결정 발표는 자신의 핵심 지지층을 향한 캠페인 연설이었다.
지난 몇 달간 백악관에선 파리협정 탈퇴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었다. 트럼프의 최측근 참모들이 양분되어 치열하게 맞섰다. 딸 이방카와 사위 재럿 쿠슈너가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과 함께 협정 유지를 간곡히 설득했고, 국수주의자인 스티브 배넌 수석전략가와 반환경론자인 스캇 프루이트 환경보호청장은 단호한 탈퇴를 강력 촉구했다.
결과는 배넌 파의 승리였다.
배넌의 논리는 간결하다 : “핵심 지지층에 천명해온 공약들을 지켜야 차기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 트럼프 당선의 뿌리인 국수주의와 포퓰리즘을 고수하지 않으면 재선이 위태롭다”
아직 지켜야할 공약들이 많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트럼프의 위험은 무분별한 언행이나 기득권층과의 다툼이 아니라 워싱턴에 안착하는 무난한 적응이라는 것이 배넌의 경고다.
파리협정 참여는 미국민의 절대다수가 지지하는 이슈다. 공화당의 과반수도 찬성하고 최근 예일대 여론조사에서는 트럼프 표밭에서도 47% 대 28%로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도 트럼프는 협정 탈퇴가 정치적 승리라는 도박을 택한 것이다. 지지율 40%에 머물러 있는 대통령에겐 위험하지만 일리 있는 전략이라고 공화당 해설가들은 수긍한다.
트럼프는 “민주당 유권자나 대다수 무소속 유권자의 지지를 얻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지지층 확대가 아니라 자신을 백악관에 보내준 핵심표밭을 단단히 다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탈퇴로 힐러리 지지자들은 트럼프를 한층 더 혐오하겠지만 정치전략 면에서 백악관은 상관하지 않는다. 사실 그래야 한다”라고 공화 여론조사가 글렌 볼저는 말한다.
물론 지난 선거에서 트럼프를 찍었던 고학력 유권자들이 등 돌릴 위험도 있긴 하다. 그러나 ‘기후변화’는 주요 선거이슈가 아니다. 헬스케어와는 다르다. 의료보험은 우리 일상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녹아내리는 빙하 인근이나 해수면 상승으로 수몰 위험에 처한 지역에 사는 유권자가 아니라면 기후변화는 표의 향방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한다. 최근 갤럽조사에 의하면 환경이나 공해를 가장 주요이슈로 꼽은 응답자는 2%에 불과했다.
배넌이 트럼프 지지층에 과시하고 싶은 것도 기후변화 반대가 아니다. 폴리티코의 표현에 의하면 “오일을 시추하고 석탄을 캐는 ‘진정한’ 미국인들을 무시하는 나약한 엘리트와 똑똑한 척하는 과학자들과 나무 포옹이나 하는 환경론자들에게 트럼프 자신도 분개한다는 공감대를 표시하며” 의회에서의 법안 통과라는 까다로운 과정 없이 공약 이행 성과를 올리기 위해서다.
의회에서도 공화당은 석탄 등 화석연료 산업 주 출신들이 가끔씩 반대 보이스를 높일 뿐 가능하면 언급 자체를 회피하고, 환경보호정책이 결정적 선거이슈가 아니라는 것을 절감한 민주당도 굳이 입법에 나서려 하지 않는다. 민주당이 백악관과 상하원을 다 장악했었던 ‘민주당 천하’에서도 기후변화 대책의 입법화는 실패했었다.
가뭄과 폭염, 홍수와 태풍, 난민과 전염병 등으로 문득문득 실감하는 ‘지구온난화’는 이렇게 경시될 수 있는 사안일까. 그 대책이 극단적 국수주의자 배넌의 선거 전략에 의해 여지없이 내쳐져도 좋은 것일까.
이번 탈퇴 결정이 기후변화가 아닌 트럼프에 대한 논쟁이 되어버린 것은 중요한 논쟁의 방향을 왜곡시킬 수 있어 위험하다고 경제 칼럼니스트 로버트 새뮤얼슨은 지적한다. 트럼프가 마음만 바꾸면 기후변화를 해결할 수 있다는 그릇된 메시지를 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동차와 에어컨과 컴퓨터를 포기하지 않는 한 현재 전체 에너지의 83%를 차지하는 화석연료는 현대문명의 기반으로 남아 있을 것이며 이로 인한 온실개스 증가로 기온은 계속 오를 것이지만 그 정확한 정도는 예측하기 힘든 것이 복잡한 진실의 내면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런데 “우파는 지구온난화를 가짜라고 폄하하고 좌파는 실행가능한 해결책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고 개탄한 그는 기후변화 대책은 양측이 정직하게 현 상황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2016년 11월4일 체결된 파리협정의 실제 탈퇴는 4년 후인 2020년 11월4일에 시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날은 2020년 차기 대선 하루 뒤다. 만약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한다면 미국은 탈퇴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지구의 행운을 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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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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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총 2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레드 스테이트를 우습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똘똘 뭉쳐서 박사모 못지 않습니다.
동의합니다. 레드넥들마져 등을 돌리면 재선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탄핵정국에 의지할 때도 없어지니 당연히 자신의 지지층이 좋아하는 내용을 선택할수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