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샌프란시스코 나들이를 했다. 스튜디오가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도 말이 샌프란시스코지 샌프란시스코 시내가 시작될까 말까 하는 남쪽 변두리에 있어서 사실 다운타운에 갈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렇건만 매일 출근할 곳이 있다는 기쁨, 게다가 그 곳은 그 누구도 어찌해 볼 수 없는 나만의 귀한 보금자리였기에 한시간의 드라이브도 힘들게 느끼지 않았었다.
철수한 후 거의 발길을 안하다가 매일 지나던 길을 오랜만에 지나며 지난 세월, 내가 정말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던거구나 싶었다. 무슨 복이 그리 많아 많은 사람들은 누려볼 수도 없는 그런 사치를 누리며 살 수 있었던걸까. 돈이 많다고 해서 아무나 가질 수는 없었던 그림 그리던 시간, 혼자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든 물구나무를 서든 무엇이든 완벽히 누릴 자유가 허용되던 나만의 공간…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정말 고맙다.
한 순간 한 순간이 찬란한 보석처럼 결정체가 되어 간직되었던 것 같은 그 나날도 그러나 꼭 행복만 있던 건 아니었다. 간절히 바라던 것이 훗날엔 족쇄가 될 수 있듯, 능력이 짧아 그림이 안되면 덫에 걸린 짐승처럼 절망감 속에서 맴돌기도 했다. 종종 내가 지금 무얼 바라며 이러고 있는걸까, 거울속의 내 모습을 바라보며, 내 맘속의 깊숙한 곳에서 또아리 틀고 숨어있는 욕망의 실체를 확인하려 안간힘을 쓰곤 했다.
아무튼 그런 시절 오랫동안 꾸준히 멤버십을 샀던 모던아트뮤지움의 멤버십을 작년엔 걸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샌프란시스코가 이제는 너무 멀리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마티스와 디벤콘의 전시가 있다는 걸 알고는 에라 모르겠다, 갔다 와서 앓아 눕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가봐야겠다 싶어 멤버십을 샀다. 까마득히 멀게 느껴지던 샌프란시스코가 정작 마음먹고 나서니 별것도 아니었다.
화가든 작가든 어떤 형태의 예술이든 일단 창작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일에 무모할 정도의 집착이 있다. 마티스는 어쩜 그렇게 자신만만 할 수 있었을까? 자신이 있었으니 자신만만 한거다. 본능적으로 자신을 믿는 어떤 알맹이가 확고하게 있었던 거다. 그런 확신이 없었다면 어린 애가 아무렇게나 찍찍 그어놓은 것 같이 체형의 비율같은 것도 지키지 않거니와 실제의 얼굴 모습이라곤 당최 떠올릴 수 없는 초상화를 무슨 수로 떡하니 내놓을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그의 그림이 갖고 있는 생동감과 매력은 마티스 외엔 그 어느 누구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천재중의 천재다. 게다가 말년에 침대에 누워서 도저히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색색의 종이를 가위로 잘라 붙인 페이퍼 콜라쥬는 정말 죽음 직전의 만개함이다. 보면 볼수록, 더 보면 더 볼수록 환상적인 그 색감과 그 이미지. 그리고 그 단순함이 주는 생명력. 마티스에게 찬탄하며 많은 영향을 받은 디벤콘도 마티스를 넘지는 못한다.
세상의 모든 물질적, 기술적 상황이 아무리 진보한다 해도 그림만큼은 세월이 간다고 해서 더 진보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아니 오히려 인간은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그림으로는 열등해 지는 게 아닐까? 그리고 모든 탁월한 화가들은 미친듯이 그것 하나만을 파고든다. 몸이 아파 누워있으면 누운 상태에서, 눈이 나빠 잘 안보이면 잘 안보이는 바로 그 컨디션에서, 물감 살 돈이 없으면 물감 대신 쓰레기로라도, 꼭 해야 할 어떤 방도를 찾아낸다.
시력에 문제가 있는데다 신체적 장애가 심했던 척 클로우즈는 시력이 나쁜 자신의 약점을 이용해 그것이 오히려 작품의 장점이 되기까지 그림을 그렸다. 커다란 자화상, 친구들의 얼굴들을 그린 초상화들은 기술로도, 재료와 방법의 온갖 시도로도 혀를 내두르게 독창적이며 성실하다.
어떻게 그렇게 피부의 숨구멍 하나 하나까지도 그려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얼마나 힘겨운 노동이었을까? 그리고 그토록 열정을 다해 작업을 하다보면 반드시 치뤄야 하는 값이 있다. 모든 걸 다 누리며 편하게 친구들과 교류하고 놀러 다니고 가정 생활, 사교 생활의 즐거움 다 누려가며 창작을 해낼수 있는 이는 어디에도 없다. 아마 그래서 인생은 공평한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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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정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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