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은 목숨 바칠 가치가 있는 나라…내 두번째 집”
▶ 9번째 방문국 벨기에
벨기에의 일정을 계획해 주고 숙소를 제공해 주신 모니크 이모와 벨기에에서 만난 첫 참전군인 피에르 할아버지(왼쪽)는 98세의 나이에도 건강했다(왼쪽). 벨기에 군인만 이용할 수 있는 ‘프린스 알버드 클럽’에서 만난 참전군인 할아버지들.
우리가 사는 지구가 작은 크기가 아닌데도 가는 곳마다 생각과 뜻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기차를 타고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 내렸을 때 마중나온 모니크 이모도 ‘그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다. 나를 돕는 ‘그 사람들’은 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거나 참전한 군인의 가족이거나 한국계이거나 한국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모니크 이모는 여사촌의 남편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벨기에 군인이었다.
벨기에는 한국전쟁에 3천 171명이 참전해서 101명이 사망하고 500여 명이 부상 당했고 2명이 실종됐으며 현재 생존자는 700명 정도라고 한다. 처음 만난 참전용사인 98세 피에르 할아버지는 1951년 한국전쟁에 참전하셨다. 100세에 가까운 나이지만 아주 건강하셔서 인터뷰를 하는 동안 손짓, 몸짓에 얼굴 표정을 총 동원해서 생생하게 당시를 설명해 주셨다. 피에르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한국전쟁의 첫 단어는 ‘추위’였다. 임진강 도강 작전 중 한가지 물품만 가지고 갈 수 있었는 데 피에르 할아버지는 슬리핑백을 선택했을 정도였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귀국짐에도 슬리핑백이 포함될 정도였다. 통역을 해줬던 피에르 할아버지의 아들도 어릴때 ‘전투이불’을 자주 봤던 기억이 난다고 말할 정도였다.
피에르 할아버지는 퇴역하신 후 참전용사협회에도 한동안 참전용사 협회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한국정부의 초청에도 응하지 않았을 정도로 한국전쟁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이 많은 듯 했다. 그 중 하나가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슬픈사연이다.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마라톤에 출전해 벨기에에 아주 값진 동메달을 선사한 육상 영웅 에티엔 게일리 선수도 기꺼이 조국의 부름에 응해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피에르 할아버지는 게일리 선수가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뛸 수 있는 공간을 찾아보자고 제안했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게일리 선수는 전쟁 도중 부상을 당해서 이후 마라톤을 다시 할 수 없게 되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 분의 동생도 함께 한국전쟁에 참전했는데 동생이 탔던 비행기가 추락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했다.
다음 날에는 레이몬드 벨기에 참전군협회 회장님을 만났다. 레이몬드 할아버지와는 여행을 떠나기 몇 달 전부터 이메일을 주고 받으면서 자주 안부도 묻고 의견을 나눴기 때문에 알던 사이처럼 반갑게 맞아 주셨다. 벨기에 군인들만 이용할 수 있는 ‘프린스 알버트클럽’이라는 곳에서 만났는데, 레이몬드 할아버지 외에 3분의 참전용사 할아버지가 더 오셨고, 한국군참전협회 비서, 벨기에군 중령, 그리고 한국 대사관의 무관도 참석했다. 특별한 곳에서 많은 사람이 환대를 해줘서 VIP대접을 받는 기분이었다. 한 참전군인 할아버지는 나를 맞아주시기 위해 새벽 3시에 일어나서 7시간을 운전해서 오셨다고 했다.
레이몬드 벨기에 참전군협회 회장과 벨기에 군인들.
할아버지들과 함께 브뤼셀의 주택가 한 가운데 있는 한국광장(Korean Square)의 전쟁기념탑도 방문했습니다. 사망자 101명의 이름이 전부 새겨졌고, 벨기에 군을 돕던 한국군 카투사(KATUSA) 이름도 새겨져 있었다.
참전군협회 회장이신 레이몬드 할아버지는 하루 종일 나와 함께 다니셨고 전쟁 당시 동지들의 얘기를 하시면서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셨다. 할아버지가 한국이 전쟁의 아픔을 이겨내고 눈부신 발전을 이룬 것에 감동한다고 하시며 “한국은 목숨을 바칠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이고 나의 두번째 집이기도 하다”라고 말씀하실때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한국전 참전군을 만나러 전세계를 다닌다닌지 40여일 지나니 내가 그 지역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참전용사 할아버지들 사이에서도 입소문으로 퍼지고 있다고 했다. 참전군협회를 통하지 않고 참전군 할아버지 두 분이 직접 연락 주시며 나를 만나시겠다며 모니크 이모 집으로 직접 찾아오셨다. 로저 할아버지와 필립 할아버지였다.
로저 할아버지는 한국전에 2차례 참전하신 후 20년간 군에 복무하고 전역하셨다고 한다. 한국 전쟁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미 두 달이 지났었다고 한다. 로저 할아버지는 귀국할 기회가 있었지만 “두 달이나 지나서 집에 가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서 전우들과 함께 전투에 참가하는 쪽을 선택했다고 한다. 필립 할아버지는 벨기에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선두부대원이었는데 치열했던 한국전쟁의 전투 상황을 상세하게 증언해 주셨다. 할아버지는 얼굴에 총을 맞으셨는데도 자신의 몸을 먼저 돌보지 않고 더 큰 부상을 입은 동료들을 도와줬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귀국해서 전쟁영웅으로 큰 상을 받았지만, 그때 입은 부상으로 오른쪽 귀는 10% 밖에 들리지 않으신다고 한다.
벨기에의 마지막 날에는 모니크 이모가 친구들을 초대해서 나를 위한 환송파티를 열어 주셨다. 처음 만난 벨기에인들이었지만 나의 여행담을 너무나도 흥미롭게 들어주셨다. 한국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분도 있었고 심지어는 벨기에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도 모르는 분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 한국전쟁에 대해서 그리고 지금의 한반도 상황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기뻤다. 지구를 두바퀴 도는 거리의 여행을 하면서 한반도의 상황을 잘 모르는 현지인들을 많이 만나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한국전쟁의 의미를 설명하고 한국이 전쟁의 고통을 극복하고 잘 살게 됐지만 여전히 전쟁 때 도와준 참전국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전할 때 힘이 솟는다. 한반도의 평화로운 통일을 위해서는 전세계 곳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벨기에의 마지막 밤은 내게 특별한 시간이었다.
벨기에 전쟁기념탑. 사망한 한국전쟁 참전용사 101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한국 카투사 전사자 이름(작은 사진)도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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