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는 프랑스의 대문호 앙드레 모루아가 집필한 ‘미국사’(김영사 간)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앙드레 모루아는 신대륙 발견부터 초강대국 반열에 오르기까지, 500년 미국 역사의 장대한 드라마를 유려한 문체와 심오한 통찰력으로 풀어냈다. 신용석 조선일보 전 논설위원이 번역을 맡아 원작의 미문과 의미를 충실히 살려냈다는 평이다. <편집자 주>
-내란과 국가의 통일
자유와 연방은 하나이며 나눌 수 없다는 말은 유명한 건배사다. 그 후부터 자유와 연방은 위기에 처한 일이 없었다. 국가의 통일 문제는 재론되지 않겠지만 그 위대한 소득은 피를 흘리는 전쟁을 치르고야 얻을 수 있었다.
헨리 클레이식 일련의 타협안으로 이런 성과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내란은 피할 수 없었을까? 한 미국인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만약 양측의 악질적인 선동분자들을 마차에 태워 강물에 쓸어 넣었다면 남부와 북부의 수많은 선량한 시민이 온건한 중도적인 해결책, 예컨대 소유자에게 보상금을 치르고 점진적으로 노예를 해방시키는 정책을 채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온건한 해결이란 온건한 민중을 전제로 이뤄지며 인간관계에서 상식은 단지 보조역할을 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국가도 개인과 마찬가지로 지나친 흥분과 열정을 겪는 법이다. 북부와 남부 모두 전쟁이라는 재판을 겪기 전에는 이성의 판단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양키에 대한 분노
연방의 승리는 중요한 상황을 연출했다. 미합중국은 리오그란데부터 캐나다 국경까지 그리고 멕시코부터 오리건까지 광대한 대륙을 점유했으나 남북 간의 잠재적인 분쟁으로 개발이 지연되고 있었다. 당시 이 지역은 여전히 인구가 희소한 소수의 부락이 서로 흩어져 있었다.
전쟁 후 이 지역은 이념과 사상을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개방되었다. 염려할 만한 충돌은 없었다. 남부인의 가슴에는 깊은 상처가 남아 있었고 그들은 양키라면 사소한 일에도 쉽사리 격분했다.
적개심에 불타는 북부의 과격파는 소리 높여 남부에 대한 보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군사적인 분쟁이 재발하지 않는 한 감정이란 시간과 더불어 진정되는 법이고 북부와 남부 사이의 실력 차이로 분쟁이 재발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1862년에 의회를 통과한 자작농법 Homestead Act이 개척과 정착을 손쉽게 했다. 이 법령에 따라 각 세대주나 21세 이상의 시민은 최저 5년간 토지를 경작하는 조건만으로 공유지 160에이커(약 20만 평)를 무상으로 제공받았다. 결국 오랜 서부의 꿈이 이뤄지면서 이주가 쇄도했다. 전후시대가 전 대륙의 개발시대가 되리라는 징조가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쟁이 남긴 유산
남북전쟁은 미국사에서 봉건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미합중국은 유럽의 봉건시대에 있었던 제후 간의 투쟁이나 중앙집권적인 전제군주 정치에 대한 집단적인 반항 같은 것은 겪지 않았지만 각 주들 간의 대립 항쟁이 그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북부의 승리는 주의 이탈과 무효선언 권리에 관한 캘훈의 이론을 뒤엎었다.
링컨은 아르망 리슐리외처럼 중앙정부의 권한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남부는 이제 연방 탈퇴 논쟁을 영원히 되풀이하지 않기로 동의했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주권 지지자가 과도한 중앙집권에 대해 당연한 권리로서 항의하는 것까지 견제하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민주당은 연방정부에 대항해 주의 권리를 옹호하는 대표선수 역할을 맡았다. 물론 이 자세는 민주당이 정권을 장악하지 못한 사실 때문에 가능했다. 민주당이 정권을 차지했을 때, 특히 큰 전쟁을 수행하는 책임을 맡았을 때는 그들도 공화당의 집권체제와 마찬가지로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유혹을 물리칠 수 없었다. 필요는 이념을 만들어내게 마련이다.
-먼로주의
미합중국은 새로운 국토 개발에 몰두한 이후의 수십 년간 유럽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1815년까지만 해도 미합중국은 유럽의 분쟁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1815년부터 1860년까지 유럽의 분쟁은 미 합중국이 대륙에서 영토를 확장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만약 영국, 프랑스, 스페인이 서로 대립하지 않았다면 신생 국가 미합중국이 그처럼 강대해지도록 방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 간의 질투심이 그들의 약점이었다. 미합중국의 군사력을 입증한 남북전쟁 이후 먼로주의는 하나의 소망이 아니라 현실적인 방책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신생강국이 유럽 열강과 전쟁으로 맞붙는 데는 아직도 30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했다.
1870년 무렵 미합중국은 마치 사춘기 소년처럼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했고 매일매일 성장했다. 모험 정신이 있는 사람들이 투쟁으로 빼앗아 씨를 뿌릴 변경지대가 있는 한 미합중국은 외부 세계에 관여하려 하지 않았다. 최후의 변경지대가 사라지는 그날부터 미 합중국은 주위를 돌아보기 시작할 테고 그때부터 국제사회에 발을 들여놓을 것이었다.
<
신용석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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