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한통운의 샌프란시스코 지점장을 하던 어느날 본사 사장으로부터 긴급전문을 받았다. (동아그룹) 회장님 일행이 이곳 방문계획이니 준비하라는 것이다. 방문 일정과 함께 방문 목적은 벡텔(Bachtel) 사 조지 슐츠 회장과 합작투자에 관한 회의이고 일행은 계열사인 동아건설 사장 등 몇 명. 그리고 또 지시가 왔다. “통역은 지점장이 하시오.”
그런데 사실 동아건설 사장이 영어를 잘해서 사업 내용을 직접 브리핑했고 나는 보조 역활로 가끔 말을 거들면서 회의 내용을 기록했다. 벡텔(Bachtel)사는 우리 대한민국의 원자력 발전소 공사를 맡았던 세계 굴지의 건설회사이다. 동아 그룹에서 거대한 간척지를 인천 부근 어디에 조성했는데 여기에 큰 위락지를 벡텔과 합작하여 조성할 계획이란다. (결국 일은 성사되지 못했다)뉴욕 태생의 슐츠 회장은 1949년 MIT(마세츄세트 공대)에서 산업경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경제학자로 그후1968까지 MIT와 시카고 대학 교수로 경제학을 강의했다.
닉슨 대통령 시절 노동부 장관(1969-70), 예산국장(1970-72), 그리고 재무장관(1970-72)을 지냈고 벡텔 사장(1975-82)을 하다가 레이건 대통령에게 다시 발탁되어 국무장관(1982-89)까지 했으니 장관을 네번이나 하고 그 큰 회사의 사장을 지낸 정계와 재계의 거물이다. 레이건 대통령의 최대 치적은 총 한방 안쏘고 소련을 해체시킨 것이다. 그리고 슐츠는 레이건 정부의 국무장관을 하면서 소련과 군비경쟁을 유도해서 소련의 경제를 파탄시킨 실무 장관이었다.
동아그룹 회장 일행 숙소는 페블 비치(Pebble Beach) 골프장의 호텔. 회의장 역시 페블 비치 클럽하우스. ‘원님 덕에 나팔 분다’고 나는 덕분에 미국 최고의 골프장의 최상급 호텔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그리고 회의 기간중에 슐츠 회장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는 것은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다. 나직한 목소리의 슐츠 회장은 주로 듣는 편이었고, 사업계획에 관한 질문이나 의견은 같이 온 중역이라는 사람이 했다.
회의 중 느낀 것은 슐츠 회장이나 같이 온 중역의 영어가 참으로 부드럽고 간결한 것이다. 나중에 들어서 알았지만 미국의 큰 회사에서는 중역들에게 speech에 관한 세미나를 종종 한단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고, 말을 하는 태도, 억양, 쓰는 단어, 핵심-point, 등으로 상대는 그 사람의 인격과 교양을 먼저 파악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슐츠 회장의 운전기사가 회장의 심부름으로 무슨 서류를 가져왔는데 그 때가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나와 식사 테이블에서 감깐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기사는 슐츠 회장을 삼십 몇년을 모셨다고 해서 “어떻게 그리 오랫동안 모셨냐”고 물으니, “그분의 특징은 어떤 조그만 일에도 항상 Thank you 를 잊지 않으신다고. 그래서 자기는 지금까지 즐겁게 일을 한다”는 것이다. 회의가 끝나기 전 슐쯔 회장이 자기가 멤버로 있는Cypress Golf Club(?) 으로 초대를 했다.
멤버 모두가 700여명 밖에 안되는 멤버 하나가 죽어야 다음 멤버를 받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골프장이라는데 클럽 하우스는 옛날에 지은 그대로의 ‘삐걱거리는’ 목조건물. 골프장 종업원들이 슐츠 회장에게 하는 인사를 하는데 모두 그냥 “George”라고 First Name 을 부르는 것이 보기에 자연스럽고 좋았다.
그날 골프는 통상의4-sum 이 아니고 내가 끼어서5-sum 이 되었다. 골프장 규정상 5-sum은 절대 안된다고 해서 나는 그냥 비켜 서 있었는데 슐츠 회장이 “너는 왜 안치냐”고 묻는다. 한 명 초과인 5-sum 이라서 나는 안한다고 하니까 멀리 서있는 헤드 프로에게 나를 가리키며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헤드 프로가 당장 달려와서 “Yes, George!” 그렇게 매정하게5-sum은 절대 안된다던 친구가 카트를 직접 운전을 해서 내게 갖다 주는 것을 보니“빽”이 안통하는 곳은 세상에 없나보다. 페블비치에서 일주일 동안 슐츠 회장을 보며 느낀 것은 그 분의 친화력(親和力)이다. 사서삼경의 하나인 大學의 첫 문장 “군자는 화이부동(君子 和而不同)” 이라더니 큰 사람은 이렇게 주위를 항상 부드럽게 하는구나 싶었다.
지난 5월 4일 아시아 소사이어티(Asia Society) 연례 만찬에서 엠벡스의 이종문 회장이 ‘리더쉽 앤드 엑셀런스’ 상을 받는 자리에 조지 슐츠가 초청되어 연설을 하였다. 올해 97세인데도 이직 말씀에 힘이 있고 눈빛이 초롱초롱하시다. 바로 옆 이종문 회장과 같은 테이불에 앉으신 그분에게 나는 하나 묻고 싶었는데 겨우 참았다. “그 때 그 운전기사를 지금도 쓰고 계시냐?”고. 세월을 꼽아 보니 벌써25년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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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수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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