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일 동안 지구 두 바퀴를 도는
▶ 7번째 방문국 덴마크-8번째 네덜란드
네덜란드 한국전 참전박물관 앞 기념탑에서 네덜란드 참전군협회 회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아직도 악몽에 시달리는
피에트 할아버지...
아픈 기억서 벗어나기를
두 손 꼭 잡고 기도 드려
1. 999일 동안 병원선을 보냈던 ‘파파상’의 나라 덴마크 (2/19 -2/23)
덴마크에서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한 분 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오히려 오랜 시간 함께 보내며 상세한 당시 증언을 들을 수 있어서 특별했다. 참전국을 방문할 때마다 나를 도와주시는 현지의 ‘엔젤’을 만닌다. 미국 의회에서 함께 일했던 인턴이거나 일제 시대 때 러시아 먼 곳으로 강제 이주된 한인 후손이거나 민주평통 해외 자문위원, 또는 유학생이나 친구의 친구 등 다양한 ‘천사’들이 내 프로젝트에 기꺼이 동참해 주었다. 덴마크에서는 전직 기자였던 75세 군보르(Gunvor) 아줌마가 공항으로 마중 나와서 나를 맞아 주었다. 덴마크에 머무르는 동안 군보르 아줌마 집에 머물렀고 참전용사협회 회장과의 만남도 주선해 주셨다.
스벤 야트 덴마크 한국전 참전군인협회 회장은 유머와 위트가 넘치셔서 인터뷰하는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스벤 할아버지를 만나 처음 간 곳은 주 덴마크 한국대사관이었다. 지난해(2016) 여름 개관한 ‘유틀란디아호 기념관(Jutlandia Hall)’을 보여주셨다. 덴마크 주재 한국대사관 대사가 몇해 전 참전용사를 위한 기념관을 만들고 싶다면서 스벤 할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했을때 “불가능하다”면서 “생존자가 몇 명 없고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자료를 모으기도 힘들것”이라고 답했는데 한국 대사관 측에서 포기하지 않고 덴마크 적십자 등 당시 자료를 가지고 있는 기관이나 사람들의 협조를 얻어서 결국 기념관을 열었다고 했다. 개인 사진에서 부터 참전용사 할아버지가 직접 만드신 한국전통문양과 덴마크 표식이 함께 장식된 가구도 있었다. 덴마크가 한국전쟁에 보낸 병원선인 유틀란디아호를 3D로 재현했고, 병원선의 침실과 조타수가 앉았던 의자 등도 전시됐다. 스벤 할아버지니는 전시품 하나 하나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전쟁 당시의 사진들이 전시된 곳에서 스벤 할아버지는 굶주린 상태의 전쟁 고아를 안고 있는 덴마크 의사와 간호사 사진을 한참 보시며 ‘한국에 있는 아들’ 이야기를 해 주셨다. 1953년 열차에 치여 다리를 크게 다친 15세 소년이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그 옆을 지나던 덴마크인이 유틀란디아 호로 데려와서 자신의 피를 수혈해 가며 결국 소년에게 새 삶을 선물했다는 이야기였다. 김주완이라는 이름의 소년(지금은 80이 되어가는 어르신이지만)은 자신의 목숨을 살린 덴마크 간호사를 ‘파파상’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후 연락이 끊겼지만 40년 만에 ‘파파상’ 요한 프리스크 씨가 김 씨를 덴마크로 초청해서 다시 만났다. 안타깝게도 감동적인 만남을 했던 이듬해에 프리스크 씨는 돌아가셨다. 프리스크 씨와 가까이 지냈던 스벤 할아버지는 김 씨를 장례식에 초청했고 자신에 집에 머물게 하며 김 씨의 ‘제 2의 파파상’이 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김 씨가 참전용사 할아버지들이 안장된 묘지에 갔을 때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를 비석에 부으며 정성스럽게 참배하던 모습이 인상 깊었다고 하셨다.
스벤 할아버지와 함께 유명한 인어상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근처에 병원선인 유틀란디아호가 출항한 곳을 기념하는 기념패가 있기 때문이다. 40년 전에 스벤 할아버지가 덴마크 정부에 청원해서 세워졌다고 한다. 유틀란디아 병원선은 1951년 1월 23일 한국으로 출항했으며 연합군 부상자의 귀환과 의약품 조달 등을 위해 한국과 덴마크를 왕복하며 3차례에 걸쳐 의료지원 파견임무를 수행했다. 전쟁 초기 부산항에 머물다 1952년 가을부터 인천항으로 옮겨 지원 활동을 했는데 999일 동안630명의 덴마크 의료진들이 근무했다고 한다.
유틀란디아 호는 비록 참전한 병원선이었지만 ‘사랑의 유람선’ 못지 않은 커플들을 만들었다. 1등 항해사였던 스벤 할아버지는 한국으로 함께 갔던 간호사와 결혼했다. 유틀란디아 병원선에서 탄생한 커플이 16쌍이나 된다고 한다. 단 한 커플도 이혼하지 않고 가깝게 지내며 즐거운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스벤 할아버지와의 즐거운 시간은 할아버지의 집까지 이어졌다. 눈이 많이 내리고 추운 코펜하겐의 저녁 시간 할아버지와 아쉬운 작별을 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탄 차가 시야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창문을 닫지 않으시고 손을 흔드셨다. 어릴 때 기억이 떠올랐다. 명절날 할머니 댁을 방문한 후 떠날 때 우리가 눈에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드시던 그 장면이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덴마크 병원선인 유틀란디아 호. 스벤 야트 덴마트 참전군협회 회장의 집에 걸려있다(왼쪽). 덴마크 병원선인 유틀란디아 호가 한국전쟁 참전을 위해 출항한 곳에 세워진 기념비. 스벤 야트 덴마트 참전군협회 회장과 함께.
2. 한국사랑 깊은 네덜란드(2/23 -2/26)
한국전쟁박물관은 암스테르담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에 있었다. 지난해 예행 계획을 세울 때 연결된 쉘라 이모 (‘더치맘’으로 불렀다)가 그녀의 오래된 자동차(무려 38살!)를 운전하며 함께 이동해줬다. 암스테르담에서 100여 km 떨어진 스하르스베르헌에 있는 한국전쟁 박물관은 2010년 문을 열었다. 참전용사 할아버지 네 분이 오전 일찍부터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비행기 운항이 취소되어 늦게 도착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시지 못하셨기 때문에 추운 날씨에 바깥에서 오래 기다리신 것이다. 많이 죄송했지만 만나자마자 꼭 안아주시면 “와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부터 해 주셔서 몸둘 바를 모를 정도로 감사하고 감동스러웠다.
할아버지들과 한국전 기념관을 함께 관람하며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네덜란드 참전용사들은 유별나다고 할 정도로 한국을 좋아하셨다. 한국에서 만났던 많은 한국인 전우들의 이름을 따라 딸 이름을 “킴”으로 지었다는 할아버지도 있었고, 중요한 모임 때마다 태극기가 수 놓아진 밀리터리 점퍼를 입으신다는 할아버지도 있었고, 전쟁터에서 만난 친구들 처럼 사후에 부산에 있는 유엔 묘지에 안장되기를 원하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대부분 밝은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해주셨지만 피에트 할아버지는 다른 분들과 달리 한국에서 겪었던 끔찍한 경험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계시고 아직도 악몽에 시달리신다고 하셨다. 한국전쟁에서 전우로 만나서 70년 가까이 죽마고우로 지내는 친구들과 만나면 자연스럽게 한국전쟁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친구들과 헤어지고 나면 그날 밤은 안좋은 꿈을 꾸신다고 했다. 대부분의 네덜란드 한국전쟁 참전군인들은 한국정부의 초청이나 자비로 몇 차례나 한국을 방문하는데 페이트 할아버지는 전쟁 후 집으로 돌아온 뒤 65년 동안 한번도 한국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무서워서 갈 엄두를 못냈다고 하셨다. 인터뷰 도중에도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참으시는 할아버지셨다.
나는 그 할아버지의 손을 꼭 붙잡고 한국사람들이 참전군들의 희생에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할아버지가 더 이상 한국전쟁의 아픈 기억으로 악몽을 꾸지 않기를 기도한다. 방문국의 참전용사 할아버지들은 대부분은 한국인의 피가 흐르면서 미국에서 온 나를 흔쾌히 만나주시며 반가워한다. 하지만 몇몇 분들은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피에트 할아버지처럼 한국에서의 기억이 좋지 않고 아직도 악몽 속에 살고 있는 분들이 많을거라 생각한다.
네덜란드는 한국전쟁에 5천 여명이 참전해서 124명이 사망했고 전쟁포로가 됐던 2명은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네덜란드의 군인들은 모두 자원해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할아버지들은 네덜란드 참전군협회가 지난해 발간한 한국전쟁 관련 책을 보여주셨는데 칼라사진으로 모든 참전용사의 이름과 언제 참전했으며 한국에서 어떤 임무를 수행했는지 상세하게 소개했다.
박물관에는 미군2사단의 상징인 인디언해드라는 이름의 신문도 있었다. 내가 모셨던 랭글 전 의원이 인디어해드 부대 소속이어서 한국전쟁 얘기가 나올 때마다 의원님은 인디언해드 부대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다. 네덜란드도 미군 2사단과 같은 작전을 수행해서 인디언해드 문양의 기념품과 자료들이 많다고 한다. 할아버지들은 내가 인디언해드 부대와 인연이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 인디언해드 장식의 넥타이와 네덜란드 참전군협회 명예회원증 그리고 며칠 동안 나를 위해 모금하신 돈을 주셨다. 네덜란드에서도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와준 것에 감사한다”는 말을 들었다. 몇 차례나 해외전쟁에 참전했지만 자국으로 초대하거나 감사 인사를 전하러 네덜란드로 찾아 오는 나라는 한국 밖에 없다면서 격려와 칭찬을 많이 해 주셨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총 2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먼저글에 추가하고 싶은것아 있네요. 미 2사단 23연대 3대대 "K" 중대 였고, 1952년 5월초에서 7월까지는 사단 후방 휴식기간에 강원도 영월 상동에있는 중석광산 경비및 태백산 만악 지역 공비토벌도 했습니다. 사실 나이가 드니 옛날 이야기가 하고 싶어 지는군요. 늙으니 주책인가요?.
한나김양의 6. 25 참전국 방문기를 처음부터 재미 있게 보고 있습니다. 각국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의 6.25 실전 이야기는 내가 체험한것과 비교도 해보고 등등. 이번 내덜란드편은 전번 불란서나 에치오피아편은, 다 같이 미2사단 (인디안 헤드) 이야기라서 더욱 관심이가는데, 한나김양이 미2사단과 인연이 있다기에 반갑고 놀라와서 이글을 씁니다. 나는 1951.6. 부터 1952. 7. 까지 미2사단에서 Kumhwa Vally 오성산, 철원 금화 금성 전투에 참전했고, 70년대 미국 올때까지 10년 이상 동두천 Cp Casey 에서, 군무원으로 근무했습니다. Fairfax 에 사니 만날수도 있을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