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와서 얼마 되지 않은 삼십 대 초반 이야기이니 벌써 삼십 년이 훌쩍 넘었다..
1970년대 말, 이 지역에서 원 배드룸을 얻어서 직장에 다니고 있을 때이다.
이곳은 흔치 않게 단층으로 된 건물이다. 나와 담장을 사이로는 나와 비슷한 나이의 ‘Dan’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주말이면 커피잔을 들고 Patio에 있는 의자에서 휴일을 한가롭게 만끽하곤 했었다.
언젠가 인사를 나누고 좋은 이웃으로 지내며 나에게 타향살이의 시름을 달래주는 친구가 되었다.
직장이 끝나는 시간이 엇비슷해서 저녁이면 만나서 시원한 맥주로 갈증도 풀었다.
언어적으로 무척 답답했을 서로 간의 의사소통은 이럭저럭 해가며 몇 달이 지났다.
우리는 의기투합해서 그 단지 안에 있는 ‘투 배드룸’으로 이사를 하여서 생활비도 줄이고 서로에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두 살 터울인 그는 동양에서 온 나와는 생각과 모든 면이 서로 다르지만,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좋은 친구로 지내게 되었는지, 그에게 늘 감사의 마음을 지니고 살고 있다.
그는 단순한 사고방식에 배울 점이 많은 친구로 같이 룸메이트로 지냈던 일 년여가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하얀 쌀밥도 좋아해서 장을 봐온 ‘ground beef’를 ‘팬’에 볶아서 간장치고 쓱쓱 잘도 비벼 먹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백인이고 형제는 위로 세 살 터울의 형이 있다.
어느 초여름에 ‘댄’과 나는 같은 시기에 휴가를 일주일 내었다.
나에게 Ione, CA 에있는 부모집에 가자고 해서 그가 며칠 전에 뽑은 스포츠카를 타고 떠났다.
서 너 시간 걸려 도착한 곳은 조용한 시골에 다운타운 정도 되는 곳이었다. ‘댄’의 소개에 이어 부모님은 반갑게 맞아 주셨다. 아버지는 부근에 있는 고등학교 영어 선생이고, 어머니는 집에서 그림을 그리며 시골에서 유유자적하며 전원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뜰에는 와인 저장소를 그럴듯하게 만들어 놓아 들어가 보니 어두 컴컴한 곳에 적당한 기온과 습도로 이색적인 구경도 할 수가 있었다.
아! 풍류가 숨 쉬는 시골의 삶이다. 집안에는 그 흔한 ‘텔레비전’도 없고 신문과 고물 라디오와 강아지 한 마리가 눈을 끔벅거리고 있다. 자세히 보니 수명이 다 되어 잘 보이지 않는듯했고 행동도 매우 굼뜨다.
저녁이 되어 어머니가 정성껏 밥상을 차려 주셨다. 다 먹은 후에 ‘댄’이 부엌으로 간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접시를 닦을 태세다. 아! 나도 눈치로 얼른 같이 가서 쓱싹쓱싹 닦았다.
그때 나의 기분이 이상했다. 한국 엄마 같으면 오랜만에 돌아온 아들에게 그렇게 당연시 그림책을 보며 나 몰라고 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 여기가 미국이지 하고 금방 알아차렸다.
그날 저녁은 ‘댄’과 나는 그 작은 동네의 ‘bar’로 가서 맥주 한 잔씩하고 기분 좋게 돌아와서 잠에 떨어졌다. 다음날은 아침 식사 후, 댄의 아버지와 함께 주위를 구경시켜주며 아직 그곳에 사는 친구도 만나고 졸업한 학교도 가보았다. 적은 동네라 많이 볼 것은 없었지만, 친구가 그곳에서 자라 왔다는 것에 정감이 가는 시간을 보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썰렁한 집안에 ‘텔레비전’ 하나 없이 사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그것이그분들의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것을 후에 알았다.
저녁 시간이다. 나는 마음가짐을 단단히 하고 식사가 끝나자마자 먼저 부엌으로 달려갈 준비를 했고 ‘댄’보다 먼저 가서 접시를 같이 닦았다.
‘댄’이 접시를 닦다 말고 제 엄마를 부른다. 엄마! 아까 그 'salami’가 맛있었는데 조금만 주세요? 엄마는 부엌 벽에 있는 것을 떼어서 반으로 자르더니만… 어저께 6불 주고 산 것이니까 네가 필요하면 3불만 내라고 한다. 난 그 자리에서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오랜만에 만난 아들에게 'salami'를 판다는 것은 내게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댄'은 '오케이'하더니 지갑에서 3불을 꺼내 주며 Thanks mom! 도 잊지 않는다. 아! 이게 미국인가? 그날 밤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광경을 본 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내가 앞으로 미국 문화와의 혼동 속에서 살아가야 함을 곱씹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 두 분께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서도 자꾸 어제의 생각이 떠 오르며 동양에서 온 나에게는 그 문화 충격이 '태산'만큼 커 보였다.
세월이 흘러 늦여름이 되어간다. 어느 날인가 '댄'은 부모님이 이곳 샌프란시스코의 '와이너리' 그리고 아들도 볼 겸 해서 주말에 오신단다. 나는 은근히 걱정이 앞서는데 친구는 대수롭지 않은 듯 여느 때와 같은 생활을 하며 주말을 맞았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늦저녁이 되어 손수 몰고 오신 'camp car'에서 간이침대를 가져와서 patio에다 펼쳐 놓았다. 나는 혹시나 눈 뜨면 별이 보이는 바깥에서 잠을 자려 하시나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하늘 높게 드리운 은하수를 찾아보며 하루를 마감하시는 듯싶었다. 나의 그때 심정은 방을 하나 내드리고 거실에서 '댄'이 자거나 내가 자는 것이 옳은 일인데... 이 친구는 부모에게 자기의 방을 권유하지도 않고 ‘굿 나잇’하며 제 방으로 들어간다.
이게 세상에 될 법한 일인가? 事親以孝(사친이효 : 어버이를 섬기되 효로써 한다)는 눈곱만큼도 없는 행동에 ‘따귀’라도 한 대 갈겨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그날 밤을 거의 뜬눈으로 보내고 동이 틀 무렵인 새벽에 한국에서 가지고 온 '신앙촌' 털 담요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곤히 슬리핑백에서 잠들고 있던 댄의 어머니에게 덮어드렸다. 아뿔싸! 마침 옆에 있던 댄의 아버지가 깜짝 놀라신다.
그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친절(?)에 당황하신 것이다. 여하튼 나는 조금은 죄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는 행동을 했으니 마음이 편했다. 옆방의 그 녀석은 잠만 쿨쿨 잘 자고 있으니 어찌 그럴 수가 있는지... 낮이 되어 모두 같이 나가서 운치 있는 곳에서 식사하고 부모님은 다음 행선지로 떠나셨다. 그때의 나는 몸과 생각은 한국인인데 이곳에서 겪어가는 것으로 인해 나의 정체성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한국적인 사고방식에 젖어있던 것을 미국 문화에 접목해가는 중에 많은 고민을 했으나 그로 인해 내 생각과 삶은 풍요로워질 수 있었다.
어렸을 적 한국에서의 할머니의 특별한 보살핌, 미국으로 이주하여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신 댄의 어머니는 소중한 만남이었다. 두 분으로 인해 훗날 내게 생긴 자식에게 두 문화의 좋은 점과 사랑, 인정 그리고 좋은 가치관을 갖도록 도와 주었음을 보람있게 생각한다.
끝으로 영원히 잊지 못할 나의 할머니와 Dan의 어머니!“고맙습니다.” 하늘나라에서 편히 계십시오.
<
방무심/프리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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