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작곡가 중에서 누굴 제일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참으로 막연한 질문이라 나도 막연하게 대답하곤 하는데 ‘다 좋아요’가 그것이다. 성의 없어 보이지만 사실 이건 진심이다. 지난 400년 동안 수많은 위대한 작곡가들이 셀 수 없이 많은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중 한 사람을 고르라는 건 마치 ‘어떤 와인 제일 좋아하세요’와 같은 고문이자 우문이기 때문이다.
클래식 음악은 시대와 사조에 따라 다르고, 그 안에서 작곡가 개인의 역량과 스타일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니 작곡가보다는 먼저 사조(르네상스,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 인상주의, 현대음악 등)를 이야기하고, 그 사조 안에서 제일 좋아하는 음악을 찾는 게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사조가 좋으냐고 묻는다면 개인적으로 바로크와 현대음악을 꼽고, 거기서 굳이 좋아하는 작곡가를 꼽으라면 바흐와 말러를 이야기하게 된다(말러는 사실 어느 사조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 두 사람 중에서는 누가 더 좋으냐고, 얼마 전 끝까지 묻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한참 생각하다보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제론 말러를 더 좋아하고 더 많이 탐구하지만 말러의 음악은 너무 깊고 크고 우주적이며 운명적이어서 언제나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여기까지 오니 자연스럽게 그리고 최종적으로, 바흐의 음악 중에서는 어떤 작품을 가장 좋아하는가로 이어졌다. 작품번호(BWV)가 1,126개에 달하는 방대한 목록 가운데 하나를 찾는 일은 그러나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가장 좋아해서라기보다 가장 자주 듣는 음악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골드베르크 변주곡(Goldberg Variations)이다.
단순한 하나의 아리아를 주제로 32개의 변주를 펼쳐 보이는 이 건반 음악은 아무리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아서 특별한 기분이나 분위기와 상관없이 자주 듣는 음악이다.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이며 건축적인 질서가 마음을 차분하게 정돈시키기 때문에 그저 단순하고 명료하게 ‘음악을 위한 음악’을 듣고 싶을 때 자주 틀게 된다. 단순하다고 했지만 그 안에 내재된 우주의 정교한 질서와 무한한 생명력, 그리고 수많은 음들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심오한 정신세계는 바흐 음악에서만 느낄 수 있는 위대한 보물이라 하겠다.
이 곡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연주로 처음 들었다. 현대 음악사에서 유별난 기인이었던 그의 기행을 여기 모두 적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통통 튀는 듯한 그의 명료한 터치와 기계처럼 정확한 표현, 낭만과 감상이 완전히 배제된 연주를 한번 듣고 나서는 그것이 기준이 되어 다른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그다지 즐겨 듣지 않게 되었다.
캐나다 출신의 천재음악가 글렌 굴드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세상에 알린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때까지 이 ‘지루한’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1955년 글렌 굴드가 첫 음반으로 이 곡을 녹음하려 했을 때 음반사의 반대가 엄청났다고 한다. 하지만 이 최초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피아노 음반은 세계적인 파장을 일으켰고, 얼마 안가 바흐의 대표곡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곡을 골드베르크가 아니라 ‘굴드베르크’ 변주곡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굴드는 50세의 나이로 죽기 바로 일년 전에 이 곡을 다시 한번 녹음했는데 22세때의 연주와는 너무나도 다르다는 점이 또 하나의 신화로 남아있다. 38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휘몰아치며 천재성을 발휘했던 첫 음반과는 대조적으로 고독이 내적으로 승화된 완숙함이 더해진 48분의 두 번째 음반은 들을수록 신비하고 명상에 빠져들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원래 이 곡은 하프시코드 연주곡이다. 바흐 시대에는 피아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나 피아노로 연주하고 있으며 하프시코드 연주는 들어볼 기회가 거의 없다. 그런데 내일(4월22일) 오후 3시 유명 하프시코드 연주자 파올로 보르디논(Paolo Bordignon)의 연주가 패사디나의 헌팅턴 라이브러리 내 로덴버그 홀에서 열린다. 드문 기회니만큼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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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부국장·특집 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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