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한국일보 샌프란시스코>에 <환경과 삶> 칼럼을 연재한 지 꼭 20년이 되었다. 1995년경부터 신문에 수필을 써오던 내게 당시 손수락 편집국장이 전문분야인 자연과 환경보전에 관한 칼럼을 써보라고 권유했었다.
나도 환경의 난제들을 쉽게 풀어 써서 독자들의 이해를 도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매달 격주로 칼럼을 써오면서 생태계 문제들과 이민의 삶에 관한 담론을 많은 독자들과 나누었다. 모아진 글들로 십 수년 전, 첫 산문집 <불타는 숲>을 출간했고, 올해 <안개의 천국>이란 제 2집을 내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세가지를 사랑했다. “환경과 글과 사람”이다. 지난 30여년 간, 세계적 미항인 샌프란시스코만의 수질(水質) 관리가 내 천직이었다. 지금도 청정한 항구를 바라볼 때마다 환경 보전에 평생을 바친 긍지를 느낀다. 더불어 나는 글, 곧 문학(文學)에 대한 사랑을 품어왔다. 환경과 생태에 관한 기술적인 글들도 문학적 향기가 풍기는 어휘를 찾고, 독자들의 공감을 일으키는 문정(文情)어린 글을 쓰려고 애를 썼다. 물론 자질이 부족해서 의도한대로 써 지진 않았지만 지금도 문학에 대한 애정에는 변함이 없다.
오랫동안 글을 써 오면서 문학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시와 소설, 수필과 평론을 쓰는 문우들이었다. 이 지역에서 이민 일세 문인들의 말석에 있다 보니 선배 문인들의 사랑과 편달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수년 간 활기차게 함께 글을 써 오시던 선배 분들이 한 분씩 노환이나 병고로 떠나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주위 문인들과 합심하여 그 분들의 가시는 길을 지켜드리거나 내 손으로 직접 관을 들어 보내 드렸다.
첫 번째 어른이 1998년 작고하신 최태응 소설가였다. 1990년 초, 버클리 대학 초청 교수로 왔던 권영민 교수에 의해 그 분의 묻혔던 작품들이 발굴되고 <최태응 전집>이 출간되었을 때 축하기념회를 크게 열었다. 1939년 <문장>에 소설 <바보 용칠이>로 등단, 해방 후 언론인으로, 6.25 전쟁 중에는 종군작가로 참전해 부상까지 당하셨던 한국문학의 산 증인이자 큰 어른이셨다.
조용하시면서도 대쪽같은 선비의 기개를 지니신 분이셨다. 말년에 뒷마당 정원에 싱싱한 아보카도나무를 가꿔 문우들에게 손수 나눠 주시던 따뜻한 심성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다.
절친했던 이재상 형도 2011년 5월, 한창 나이인 67세로 돌아가셨다. 내가 처음 한국일보에 글을 선보일 무렵, 그는 벌써 북가주에서 명망 있는 수필 칼럼을 연재 중이었다. 타고 난 직관력과 감성이 무르익은 그의 글이 좋아 자주 만났었다.
가끔 직장에서 가까웠던 그의 일터, 식품점을 찾아가면 그는 나를 친동생처럼 맞아주었다. 둘다 6.25 때 학자셨던 아버지가 납북되셔서 혈육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커온 성장기가 우리를 남다른 인연으로 묶어 주었었다. 그러다가 그가 가게를 팔고 은퇴를 하였다. 못다한 외국 여행도 자주 하고, 써놓았던 글들을 금새 서너 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그는 쉼 없는 창작욕으로 계속 좋은 글을 써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혈액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마지막 까지 글을 쓰겠다고 랩탑을 갖다 달라는 부탁을 받은 며칠 후 그는 홀연히 떠났다. 그와 그의 글을 아끼던 많은 친지들과 독자들로 너른 성당이 가득 찼었다. 모두 그를 아쉬움 속에 보내드렸다.
2015년엔 아동문학가 주평선생님이 85세에 돌아가셨다. 선생님을 처음 뵌 건 1990년, 북가주 초연인 “맹진사댁 경사”라는 연극무대에서 였다. 이곳에 극단「금문교」를 만드신 후 올린 첫 작품이었다. 당시 무대 예술에 목말랐던 교포사회의 열띤 갈채를 지금도 기억한다. 그 후, 선생님은 매년 ‘춘향전’, ‘효녀 심청’등을 무대에 올리며 황무지 같던 이민 연극 예술에 불을 지피셨다.
“시집가는 날”에서 앞니 빠진 맹노인으로 춤을 덩실덩실 추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쩌면 저다지도 신명나실까? 피가 마르고 뼈에 사무치도록 평생 해오신 연극이 아직도 새신랑 신부 맞듯 좋으실까? 선생님을 뵈면, 예술은 손끝이나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님을 새삼 느꼈었다. 굿하 듯 신을 다하고, 온 몸과 혼을 송두리째 내 던지고 불 사르듯 하셨다. 평생 연극으로 살아 오셨음에도 늘 예술이 하늘 같이 좋았던 분이셨다.
말년에 선생님과 두가지 약속을 했었다. 하나는 병세가 좀 나아지면 우리 집에 모셔서 집사람이 모아둔 당신의 동화 전집들을 돌아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가 준비하고있는 다음 졸작수필집에 서문을 써주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병세가 심해져서 결국 못 오시고 말았다. 내 수필집 출간도 미뤄져 결국 두 약속 다 지켜드리지 못했다. 그나마 선생님 곁에서 간간히 말동무가 되어드렸던 게 위로가 된다.
올해 2017년 4월, 몇 주 전엔 시인 염천석 목사님께서 갓 80에 소천하셨다. 염 목사님은 늘 겸손하고 자상하신 성직자이셨다. 또한 목사님은 <새시대 문학>과 <현대 문학>으로 추천 완료된 문인이셨다.
1990년 중반 내가 처음 염 목사님을 뵈었을 때 그는 미주 시인 협회 부회장으로 계셨고 이미 <임진강은 흐른다>, <나를 찾습니다>등, 여러 편의 시집을 출판하셨다. 그리고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을 받으신 부친을 기리는 저서 <죽어서 산사람>을 출간하셨을 때 온 북가주 문인들이 모여 출판 기념을 해드렸던 때가 엊그제 같다. 얼마전 까지 울림이 큰 목소리로 전화를 주시면 좋아하시는 함흥냉면을 대접하겠다고 했는데 결국 도리를 못하고 말았다.
지면이 부족해 돌아가신 이 지역의 모든 문인 선배님들을 추억 못 드리는 게 송구스럽다. 그러나 나는 한 분 한 분 한결같이 모국어와 문학을 사랑하고 신실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셨음을 진한 감사함으로 기억하고 있다. 글에 대한 열정과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가꾸며 살아오신 참 문학인의 본을 보여주신 것이다.
모두 구름에 달 가듯이 떠나셨다. 한편의 시처럼, 담백한 수필처럼, 유장한 소설처럼 향기로운 삶을 살다가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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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봉 (수필가,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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