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어른 한분이 우리의 곁을 떠나 하나님 품에 앉기셨습니다.
염천석목사님.
20여 년 전 크리스찬 라이프의 발행인 컬럼 “일사일언”을 읽으시고 “꼭 목사가 되라”는 글과 함께 책 한 권을 보내 주셨습니다.
시집 “죽어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선친이신 염학섭 목사님의 생애를 담은 글이었습니다. “이슬같은 언어를 걸러 엮은 시집이 아닌 해골 골짜기에 메아리 치는 통곡”이라는 시인 염천석 목사님의 통곡을 읽고 저는 멍한 충격에 빠졌었습니다.
염천석 목사님을 추모하는 이 자리에 그 분의 부친 염학섭 목사님을 초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산이 높으면 그 만큼 골도 깊다. 나는 내 아버지에 짓눌려 그만 주눅이 들어 버렸다. 깜빡 죽었다 살아나도 도저히 당신을 닮을 수 없는…당신의 그림자만 닮아도 조금은 똑똑했을텐데 ..
어쨋거나 당신은 하나님과 사람 그 가운데 토막이라고 감히 우긴다 나는” 아들은 아버지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20대 청년 염학섭은 빼앗긴 조국을 찾으려고 백두산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군에 의해 세번 투옥당하고 사형장의 총부리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난 독립투사였습니다. 백두산 지하봉, 노령봉, 천황봉에서 60일, 40일, 100일 풀뿌리와 산열매를 뜯어 먹으며 기도하던 기도의 사람으로 백두산 산골마을 10여 곳의 담임목사와 순회목사로 공산당을 반대하여 정치 보위부에 투옥되었던 반공주의자입니다.
백두산 기슭에서 태어나 염학섭 목사님의 전도로 열 세살에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전 한국 신학대학교 총장 조향록목사님이 1971년 신동아에 게재한 글중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여 목숨을 내놓고 사는 것,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자기의 전 존재를 불태우며 사는 것, 내일을 꿈같이 그리며 오늘을 오히려 웃으면서 참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전도자요 종교가의 생활이라는 산 표본을 그에게서 볼 수 있었다”6.25 전란 중인 1952년 12월 눈내리는 밤, 아버지와 막내 아들은 빗발치는 총알을 피해 작은 조각배의 노를 저어 열 하루만에 경상도 영덕에 도착하였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북에 두고온 아내와 자녀들을 그리워하며 재혼하지 않고 홀아비로 키운 막내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소원하셨습니다.
부산의 감천교회, 서울의 한성교회와 천은교회, 천막촌 동네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의 아들로 산 염천석 목사님. 얼마나 배 고프고 외롭고 헐벗음의 수치심으로 고통하셨겠습니까. 그럼에도 청년기의 그 긴 방황을 벗고 목사가 되셨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염천석 목사님은 참 사랑과 정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제가 아프리카 선교를 시작하자 참 사랑으로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저희 가족이 샌프란시스코 자택을 찾아가면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좋아하시던 목사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제가 책을 펴 낼 때나 선교회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격려의 시를 보내주시고 직접 행사에 참석하셔서 낭독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저에게만 그렇게 하신게 아닙니다. 작고하신 수필가 이재상 선생이 말했습니다.
“화재로 가게가 불타버려 넋을 잃고 앉아 있는데 염천석 목사님이 찾아오셔서 아무 말 없이 연기에 그슬린 물건을 챙기시더니 잔잔한 미소로 돈을 내밀어 주시고 가시는 목사님을 보면서 참 성직자의 모습을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사랑과 정에 헤픈 사람이어서 칼끝에 스친 듯 상처도 깊다”는 목사님은 불의를 참지 못하는 옳곧은 삶을 사신 분입니다. 아버지와 꼭 닮은 삶을 사신겁니다.
군사정권시대의 부조리를 향해 외치던 저항 시인이 조국의 문민시대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침묵으로 통일을 염원하는 시를 쓰셨습니다. 지금도 제 책장에 꽂혀 있는 시집 “죽어서 산 사람”“나를 찾습니다”“쌍둥이”“임진강은 흐른다”“통일춤”. 하나님과의 은밀한 만남, 이웃사랑과 민족사랑, 고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고인의 외침이며 통곡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염천석 목사님.
당신의 그 조용한 외침은 이제 이 땅에 메아리쳐 잠든교회와 분열된 민족혼을 깨우는 큰 우뢰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젠 이 세상의 번뇌 떨쳐버리고 하나님 품에 앉겨 편히 쉬소서.
<
김평육 선교사/ 월드 미션 프론티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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