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환갑이 넘으면 인생의 활동을 끝내고 은퇴하는 마음으로 일선에서 물러나야 될줄로 알고 내 나름 모든걸 마무리 한 후 큰 딸의 요구를 받아 비상 대기조로 취직해 미국에 이민 왔다.
딸이 직장에 다니므로 두살반된 손녀를 유치원에 데리고 다니는 임무를 맡은 것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60부터라고 생각지도 않게 그 손녀가 다니던 유치원에서 보조선생으로 10년을 일을 하고 은퇴를 하게 됐다.
이제는 정말 쉬는가보다 했는데 이번에는 둘째딸이 한국에서 초등학생인 두 딸을 데리고 와서 공부시키는 바람에 급할 때면 언제든지 출동해야 하는 비상 대기조로 또 다시 취직을 하게 됐다. 둘러보니 나 같은 처지의 노인들이 꽤 많다. 한국 사람뿐 아니라 미국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부모들이 일을 하니까 시간 밖에 없는 노인들이 거들어주고 돌보아주고 사랑해준다. 힘이 없는 우리들에게는 딱맞는 일이고 아이들에게도 안전과 정서면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딸은 엄마가 이렇게 도와주는걸 항상 고맙고 미안해한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내가 더 고맙다.
내 자식 기를 때처럼 사생결단하고 먹여살려야 하는 절대 의무가 아니면서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선택적인 일이며 노느니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즉 자식도 도와주고 손주도 사랑하고 외로움도 달래는 노년에 할 수 있는 가장 가치있는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손주 길러봐야 아무 소용이 없더라며 아이들을 돌보느니 동냥자루를 잡는게 낫다고 나를 비웃는다. 그러나 나는 이런 사람들은 참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내 자식도 사랑할 수 없는데 어찌 내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겠나?나도 큰 손녀가 어릴 때 그림 그린 것을 보고 섭섭할 때가 있었다. 학교에서 가져오라는 가족 그림에 달랑 자기 세식구만 그린 것이다. 같이 살고 있던 나는 “할머니는 어디 있니?” 하니까 당황한 손녀는 할머니는 우리 사진 찍어주고 계시지 않아요? 라고 해서 그애의 순발력이 귀여워 웃고 말았다.
그렇게 나는 소외된 늙은이인줄 알았는데 대학으로 떠나던 며칠전 식탁에서 그 애가 놀라운 말로 사랑을 되돌려주는 폭탄 발언을 해서 우리 모두는 깜짝 놀랐다. 자기가 성공을 해서 TV에 나가게 되면 할머니를 모시고 나가겠다는 철들은 소리를 하고 떠난 것이었다.
사랑에는 공짜가 없이 반드시 열매가 열리는 것을 체험했다. 힘들고 귀찮아 동냥자루를 쥔 사람이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랑에는 희생이 따르고 희생은 다시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는다.
나는 네명의 손주들이 하트 속에 귀걸이까지 그려넣고 ‘사랑해요’라고 온갖 표현을 써서 준 쪽지들이 앨범을 만들만큼 모아졌다. 자세히 보면 그 속에는 새 싹들의 무한한 희망과 무지개색 꿈 그리고 순수한 사랑의 마음들이 가득 들어있는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나의 보석들이다.
지금 나는 내자식 기를 때는 허겁지겁 기르느라 그리고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못했던 애틋한 사랑의 표현들을 주고 받으면서 더없이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러한 직업도 줄어들 날이 머지 않은 것 같다. 신문을 보니 일본의 출산율이 옛날보다 훨신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뿐 아니라 우리나라는 벌써부터 줄어들어 2020년에는 학생수와 대학교 정원수가 같아진다는 통계가 나왔단다.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딱 3년 후의 일이다. 우리 부모들은 5자녀 이상 낳아 길렀고 우리 때는 보통 3명 정도 낳아 길렀다. 내 자녀들은 하나 아니면 둘을 낳았는데 지금 젊은 애들은 한집 걸러 한명 낳기란다. 그런데다 이제 혼자 사는 싱글족이 늘어만 간다는데 출산율이 어떻게 될까 걱정이다.
옛 어른들은 말하기를 제 먹을 복은 제가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의 젊은 애들은 어마무시한 사교육비와 지나친 양육비에 눌려살 것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아이 낳기를 꺼리는 딩크족 시대가 됐는가 하면 결혼까지도 꺼려 이제 “결혼은 필수가 아니다” 라는 인식이 생겨 비혼시대가 되기까지 이르렀다.
혼술, 혼밥, 혼람도 괜찮고 결혼으로 인한 경제적 압박과 가족에게 시달리느니 혼자 사는게 낫다는 편한 가치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앞으로 과학의 발달로 없어지는 직업의 직종이 많아지고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인공지능의 직업도 생긴다는데 결국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 늙은이들이 할 수 있는 비상 대기조 직업도 없어질 날이 머지 않은 것 같다.
정신과 교수 이시형 박사는 행복은 세로토닌을, 사랑은 옥시토닌을 만들어내 사람을 건강하게 해준다고 강연하는 걸 보았다. 나는 이 노년에 손주들을 사랑하고 손주들은 나를 사랑하며 서로 상생함으로, 날마다 옥시토닌과 세로토닌이 분비되는, 혼자 사는 사람은 누릴 수 없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음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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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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