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들이 활짝 열린 봄날, 산행을 하였다. 산타크루즈 산자락에 숨은 퓨리시마 능곡에 올랐다.

새벽 안개가 신비로운 기운처럼 온 계곡에 충만해 있다. 레드우드 잎새에 밤새 고인 안개 이슬이 미풍이 불 때마다 뚝뚝 물방울을 이마에 드리운다. 어느 시인이 이 부서지는 방울들을 물햇살이라고 했던가. 오랫동안 도심의 탁한 매연에 시들어가던 폐부를 열고 생명의 기운을 들이마신다. 싱그러운 초록의 장원(莊園) 속에 몸과 마음을 담근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 <그꽃>)

오십 년간 오직 한 길, 독보적인 재배법으로 국제 난 학회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 오신 최안나 여사가 길가에 핀 물망초를 보고 시를 읊어 주신다. 여사는 그간 80여 새 품종을 탄생시키셨다. 이름 없는 종자를 자식을 낳는 정성으로 이 세상 처음 꽃을 피우고 모두 한글 이름을 붙여 세계 난 목록에 올리셨다.

그리고, 7~8년 만에 한번 피는 신비스런 난들을 매년 다른 종들로 번갈아 피워 내신다. 난의 특유한 자태와 향기가 보통사람의 눈에도 금방 구별이 될 정도이다. 그 빼어난 작품들로 인해 세계 난 전시회에서 매년 대상(大賞)을 놓치지 않으셨다.

이론에 밝은 미주와 유럽 식물학자들, 난 전문가들도 혀를 내두른다고 한다. 한국인으론 유일한 국제 난 심사위원의 자격으로 지구 곳곳을 다니시면서도 동양란처럼 늘 겸손하시다.

“평생 키우다 보니 화려한 교배종보다는 수수한 원종(原種)에 훨씬 마음이 갑니다. 왜냐하면 자연에 가깝기 때문이지요. 사람이 만든 꽃과 자연 그대로인 꽃은 내재적 품위와 향기에서 큰 차이가 느껴져요. 제가 젊어서 명예와 성취감을 위해 꽃을 키울 때 못 보았던 그 수수한 풀꽃들이 이젠 내려오면서 하나씩 눈에 띕니다. 그래서 고은 시인의 ‘그꽃’을 자주 암송하지요”

난초에 문외한인 일행들을 위해 여사는 쉽게 설명하신다. “난의 향기는 누가 동반자인가에 의해 좌우되어요. 열대 뉴기니의 난들은 모양과 색깔이 현란하지만 시체 썩는 냄새가 나지요. 거긴 벌과 나비가 없고, 파리 떼들이 꽃가루를 나릅니다. 꽃도 이들을 꾀는 냄새를 뿜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가 하면 밤에만 향기 나는 난도 있어요. 야행성 곤충들을 부르기 위함입니다. 사람의 향기도 공생(共生)하는 친구들에 따라 달라짐과 같다고 할까요”

나는 식물도 피를 흘린다는 여사의 말에 아! 하고 공감하였다. 사람들은 불가에서 동물의 살생만 금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식물도 함부로 꺾으면 살생이라고 하셨다. “식물을 꺾을 때 흘리는 진이 하얀 피이지요. 꺾으면 꽃도 나무도 꼭 같이 아파합니다. 그래서 모든 생물의 희생에는 가려서 하는 살생유택(殺生有擇)이 온당한 지혜라고 믿습니다”

얼마 전, 미 동부의 난 전문가가 여사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는 이름난 원예학자로 첨단시설을 갖춘 큰 온실에서 난을 오랫동안 재배해온 분이었다. 그런데 똑같은 씨로 꽃을 키워도 자기는 네댓 송이가 고작인데 여사는 수십 송이를 풍성하고 수려하게 피우는 게 너무 신기하고 놀랍다고 했다. 그래서 그 비결에 대해 책을 쓰고 싶어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여사의 집 뒤뜰 재래식 온실의 검소하고 단출함에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난 재배의 비결은 꽃 한 송이, 줄기 한 포기마다의 아픔과 기쁨을 읽는 것입니다. 습도가 필요하다고 자동 분무기에서 물을 뿜어대고, 온도도 시간마다 조절하는 현대 과학의 온실에서는 한 포기마다의 처지를 알 수가 없어요. 난을 돌보는 마음은 꽃마다의 사정을 알고 한 생명을 깊이 사랑하는 어미 같은 마음이어야 하지요. 저는 꽃송이마다 이름을 불러주고 볼을 맞춥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중에서)

석양 무렵, 산에서 내려오면서 여사 덕분에 나는 비로소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을 마음으로 읽게 되었다.

<김희봉 (수필가,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