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직 대통령 사이의 갈등은 전에도 드물지 않았다. 퇴임한 허버트 후버는 계속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혹평해 그를 분노케 했고, 해리 트루먼과 후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얼마나 관계가 껄끄러웠던지 취임식장으로 차를 함께 타고 가는 내내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 냉랭함을 과시(?)했다고 하며, 로널드 레이건이 엉망인 국정상태를 남겨준 지미 카터에 가혹했듯이, 버락 오바마도 조지 W. 부시의 정책 평가에 관대하지 않았다.
그래도 공개적으로 충돌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전임자를 정중하게 ‘내버려 둔다’는 역대 대통령들이 지켜온 불문율이었다. 사사건건 험담하는 테디 루스벨트에 대한 우드로 윌슨의 사색적 대응이 대표적이다 - “루스벨트 같은 적을 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의 머리 위로 별을 바라보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주말 터트린 트윗 폭탄은 “트럼프이니까…”라고 접어주어 온 워싱턴 정계를 새삼 충격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끔찍하다! 오바마가 대선 승리 직전에 트럼프타워에서 나를 도청했다는 사실을 지금 막 알게 되었다. 이건 매카시즘이다!”
해외정보감시법원의 사전 승인 없는 도청이 사실이라면 그건 ‘범법 행위’다. 140자 트위터로 화풀이할 토픽이 아니라, 걷잡을 수 없는 스캔들로 비화되면서 정국을 마비시킬 폭발력을 지닌 중대 사안으로 정식으로 수사해야할 이슈다.
트럼프의 플로리다 별장 마라라고에서 지난 토요일 새벽 6시35분에 시작된 ‘오바마 도청’ 트윗은 7시2분까지 “얼마나 저급한가” “닉슨/워터게이트다. 나쁜(혹은 역겨운) 사람!”등 선동적 내용의 트윗만 3차례 더 이어졌을 뿐 그 주장을 증명할만한 아무런 근거도 제시되지 않았다.
사안의 중대성을 먼저 깨달은 것은 트럼프의 참모들이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한다. 자신들의 보스가 전임 대통령에 대한 공격포문을 열었다는 현실을 파악한 참모들은 혼비백산하여 분주히 움직였다. 백악관 변호사를 포함한 컨퍼런스콜이 계속되며 대책마련에 돌입했다. 트윗을 날린 후 한동안 기분이 좋았다는 장본인 대통령은 골프를 치고 돌아온 한낮이 지나서야 자신이 너무 나갔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트럼프팀 핵심멤버들을 낙마시키고 궁지로 몰아가며 확대되는 ‘러시아 커넥션’에서 화제를 돌리기 위한 물 타기 작전이라는 분석도 있고, 원래 ‘진실’에는 관심이 없는 데다 정상적인 충동조절 능력이 부족해서라는 시각도 있다.
일부 측근들은 새 행정부에 태클을 거는 ‘정보 유출’이 오바마 탓이라는 트럼프의 확신이 굳어지고 있는 때에 극우보수 매체에 보도된 “도청” 음모론이 트럼프를 사로잡았다고 분석한다.
금요일, 트럼프는 대단히 화가 나 있었다. 며칠 전 의회연설에서 쏟아진 “대통령답다”는 찬사가 제프 세션스 새 법무장관에 대한 러시아 커넥션 의혹으로 묻혀버린 데다 행정부 내 정보유출이 계속되며 도무지 러시아 늪에서 발을 빼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새 인선이 부진한 트럼프 정부 곳곳엔 아직 오바마 사람들이 남아있고 또 오바마가 임기 마지막에 차기정부에서 조사할 ‘러시아 내통’의 증거인멸을 막기 위해 낮은 보안 등급자도 쉽게 접근해 관련정보를 확산시킬 수 있도록 규정을 바꾸어 놓은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바마의 도청’이라는 음모론이 전해졌다. 보수 라디오 호스트인 마크 레빈이 오바마가 ‘경찰국가의 전술’을 사용해 ‘조용한 쿠데타’를 벌였다고 주장했고 극우매체 브레이트바트 뉴스가 레빈의 주장을 보도하며 수사를 촉구했는데 이것을 본 트럼프가 ‘도청’ 주장으로 정계를 휘저어 놓은 것이다.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음모론 수준의 보도인데다 정식으로 도청을 언급하지도 않았다. 브레이트바트가 “트럼프타워의 컴퓨터 서버를 조사하라는 법원의 승인이 있었다”는 영국발 기사를 링크시켜 놓았지만 그 기사 작성자도 자신은 도청 관련 기사는 쓴 적이 없다고 밝혔다.
공화당 경선 당시 라이벌 테드 크루즈의 아버지와 케네디 대통령 암살범 관계를 시사하는 허위보도를 들먹인 것을 비롯해, ‘사기꾼 힐러리’ ‘가짜뉴스’ ‘조작된 언론’ ‘불법투표’ 등 끊임없이 음모론에 꽂혀온 트럼프 취향이 이번에 대형사고(?)를 친 것이다.
오바마 측에선 즉각 정보고위관계자들도 나서서 단호하게 부인했고,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 의원들도 트럼프의 주장을 외면하며 거리두기를 애쓰고 있다.
트럼프 참모들이 결정한, 유일한 해결책은 의회로 떠넘기기다. 의회에 조사를 요청한 백악관은 아무 증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혹은 못한 채) “의회에서 조사결과가 나올 때까지 더는 언급하지 않을 것”이라며 시간 벌기에 들어갔다. 아마 몇 달은 걸릴 것이다.
게다가 공화당 주도 의회는 초당적인, 공정한 조사를 할 수 있을까.
사실 더 근본적 문제는 대통령의 음모론 취향일 것이다. USA투데이의 해법이 씁쓸하지만 눈길을 끈다. “트럼프의 불안정한 트윗폭풍은 유대계인 딸과 사위가 안식일을 지키느라 곁에 없는 금요일 밤과 토요일에 발생한다고 한다. 아버지가 위험해질 때 자동차 열쇠를 치워버려야 하는 자녀들처럼 그들(이방카와 쿠쉬너)에게도 ‘트위터 개입’을 해야 할 때가 왔다”
먼저 트윗하고 후에 생각하는 “무책임한 대통령의 무모한 주장”에 길들여져 가는 요즘의 세태가 문득문득 두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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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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