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어둑 어스름이 내릴즈음 굵은 눈발이 끊임없이 달려드는 길을 엉금엉금 기어간다. 흰색 종이를 마구 구겨놓은듯한 산들의 행렬, 길 양 옆으론 푸르스름한 눈 벌판이 계속 다가든다. 하루 밤을 자고나니 섭씨 영하20도, 꽁꽁 언 유타의 대지 속으로 스며들 듯 미끄러져 들어간다. 결코 끝날 것같지 않은 잿빛 소금벌판, 소금기를 머금어 얼수 없는 말간 호수 속엔 희뿌연 하늘과 먼데 산이 거꾸로 정적을 지키며 앉아있다.
이리도 광막한 소금벌판이 지구상에 또 어디 있을 것인가. 하늘도 벌판도 설산의 행렬도 모두 하얗게 얼어있어 입체감 없는 그림처럼 그저 먼 환상의 세계인 듯 멀다. 해는 모양을 드러내지 않은 채 희뿌연 빛의 입자들을 뿌려놓고 소금 호수의 적막은 괴괴하기까지 하다.
하늘과 산과 호수, 벌판의 경계가 모호하게 뒤섞여 전체가 안개에 휩싸인 듯한 대지, 유타의 한 겨울 속으로 차는 빨려들어간다. 유타의 집들은 어딜 가든 단아하고 말끔히 정돈된 느낌이다. 시골이나 변두리 허름한 동네일지라도 갓 페인트를 새로한듯 벽과 지붕들이 깨끗하고 창고나 마굿간일지라도 허물어진 데를 발견할수가 없다. 몰몬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지만 나는 이 단정함을 보면서 혹시 몰몬의 정신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어렴풋이 가늠해본다.
Heber City, 작은 산간마을 , 때마침 일요일, 대다수의 점포들이 영업을 하지않아 밥 한끼 사먹기 힘들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다운타운 한복판에 서있어도 사람조차 보이지 않는, 마치 고스트 타운에 와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바로 옆 마을 Midway로 들어서니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이곳으로 온걸까, Ice Castle 거대한 얼음 조형물들이 펼쳐져 있는 눈 벌판에 어른, 아이 할것없이 모여든다.
물이 뿜어져 나오면서 그대로 얼어붙은 듯, 각양각색의 모양을 한 거대한 조형물들 사이로 혹은 그 속으로 사람들은 들락거리며 즐거워한다. 조형물들 사잇길들을 걷기도 하고, 그 위로 오르기도 하고, 머리 위로 수없이 매달린 고드름이 떨어질 것만 같은 얼음 동굴 밑에서 아찔해하기도 하고, 얼음 레일을 썰매로 미끄러지기도 하며 우린 모처럼 아니 처음으로 아이가 되어 여기저기 촐랑촐랑 뛰어다닌다.
해가 기울자 여기저기 조형물들 속에 숨겨놓은 조명들이 색색으로 빛을 내자 얼음을 통과한 그 빛들이 환상의 세계를 연출하고 사람들은 사진에 매 순간을 담느라 열심이다. 해가 완전히 산 너머로 자취를 감추었는데도 얼음과 눈이 내비치는 빛으로 주변은 백야를 이루어 푸르스름한 대기에 둘러싸여 있다.
Ice Castle지역을 벗어나 옆에 자리한 자그마한 동산 아래 Crater 라 써있는 문을 열자 수증기가 훅하고 끼친다. 너른 벌판에 뻥 뚫린 분화구가 아니라 동산 안에 숨어있는 분화구라니 신기하다. 분화구엔 뜨거운 물이 차올라 동굴 온천을 이루고 있다. 가장자리를 따라 온천욕을 하는 사람들, 스쿠버 다이빙 장비를 갖추고 분화구 속으로 잠수하는 사람들, 스킨스쿠버를 즐기는 사람들로 작은 동굴 안은 북적인다.
벽난로 앞에서의 맛있는 저녁식사, 미네랄 온천에 몸을 담근 채 바라보는 창 밖 눈 풍경, 아름다운 리조트, 회상에 잠긴 듯 아련한 가로등 불빛 아래 길들은 나른한 꿈을 꾸고, 불 켜진 창문들 마다 소근대는 밤, 설국에서의 하룻 밤을 자고나니 소복히 쌓인 눈 위로 햇살이 눈부시다.
타지에서의 날들은 아침 공기, 햇살, 들녘, 나무들, 집들, 저녘 불빛, 하늘에서 내리는 눈조차 처음 만나는 것들로 모든 것이 설레임이고 들뜬 기쁨이다. 그래서 섭씨 영하 20도의 유타, 이 작은 마을의 겨울은 유난히 따뜻하고 푸근하다. 아이처럼 눈밭을 뛰어다니는 것, 그 즐거움이란… . 돌아오는 길 내내 그 눈밭이 미소와 더불어 온다.
그렇다, 다만 노래하는 자가 되기보다, 단지 관조하는 자가 되기보다, 멀리 초연한 자가 되기보다, 그저 사는 자가 되기로 하자, 눈밭을 뛰어다니며 넘어지고 미끄러지며 그래도 웃는 아이처럼. 그러면 훗날 한 세상 정말 잘 살았노라 말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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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자(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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