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대통령은 야심찬 계획을 갖고 출발한다. 밀월기간인 취임 초기에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밀어붙이며 기선을 잡으려는 전략이다. 그러나 곧 예상치 못한 사태에 직면한다. 말만으로도 통했던 캠페인과는 다른, 뜻대로 되는 것 없는 ‘통치 현실’의 벽이다.
경제 살리기에 올인하는 와중에서도 오바마는 미 선박을 나포한 소말리아 해적 소탕에 나서야 했고, 앨 고어와의 재검표 전쟁에서 상처투성이로 신승한 부시는 이라크 등 해외분쟁에 끌려들어갔으며, 동성애자 군복무 논란에 휩싸였던 클린턴은 얼마 안가 종교집단에 대한 정부의 과잉진압으로 대량 인명피해를 빚은 웨이코 참사를 겪어야 했다.
도널드 트럼프 새 대통령도 다르지 않다. 취임 한 달도 채 안되었는데 백악관이 휘청대고 있다. 국내외의 위기 때문이 아닌, 그가 자초한 상황 탓이라는 게 다를 뿐이다.
특히 지난 며칠 강펀치가 연달아 날아들었다. 법원이 트럼프의 ‘무슬림 금지’ 이민행정명령 일시중단 판결을 내린지 불과 나흘 만인 13일 밤 그의 국가안보보좌관 마이클 플린이 러시아와의 부적절한 ‘내통’ 논란으로 사임한 것이다.
플린 낙마의 후폭풍을 최소화하느라 백악관이 동분서부 했던 14일에도 스캔들은 꼬리를 물었다. 정부윤리국은 TV인터뷰에서 트럼프의 딸 이방카 상품을 홍보한 백악관 선임고문 켈리앤 콘웨이에 대해 백악관에 징계조치를 촉구했으며, 트럼프가 지난 주말 플로리다 리조트에서 열린 일본총리 초청 디너파티의 공개된 자리에서 북한 미사일 발사 대책을 논의한 사실이 알려지자 하원 정부감독위는 백악관에 해명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그리고 15일엔 불법체류 가정부 고용 등으로 인준거부 위기에 몰린 앤드루 퍼즈더 노동장관 지명자가 자진사퇴했다. 장관 지명자 중 첫 번째 낙마다.
폭발력 가장 큰 결정적 스캔들은 플린의 사임이다. 플린의 사임 자체가 큰 충격은 아니다. 트럼프 못지않은 독불장군에 한 성질 하는 그가 워낙 논란 많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국방정보국장 시절 테러집단 ‘이슬람국가’(IS) 대책 등에 대해 백악관과 자주 의견 충돌을 빚으며 오바마 정부의 ‘소극적인’ 군사 정책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다가 결국 대장으로 승진하지 못한 채 전역한 초강경파인 플린이 새 대통령의 전쟁 결정에 최종자문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 안보 전문가들이 몸서리를 쳤다는 뒷이야기도 들린다.
전역 후 푸틴과 러시아 관영 TV의 행사에도 나란히 참석하며 친러시아 성향을 유지해온 그는 트럼프 캠페인 초기부터 합류하여 안보 브레인 역할을 담당해 왔다. “무슬림에 대한 공포는 합리적”이라고 공언하여 논란을 빚기도 했고 “힐러리를 투옥하라”는 캠페인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런 충성에 대한 보상으로 얻어낸 ‘안보 총사령탑’의 자리를 플린은, 그러나 4주도 채 누리지 못했다.
플린 사임사태의 진상은 일지를 따라 가보면 한 눈에 드러난다 :
지난 12월29일 오바마 대통령은 러시아의 미 대선개입 해킹에 대한 제재를 발표했고 같은 날 플린은 주미 러시아대사와의 전화에서 제재에 대해 논의했다. 이 통화를 FBI가 도청했고 플린과 러시아 대사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루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1월15일 마이크 펜스 부통령 당선자는 TV인터뷰에서 플린이 자신에게 말한 대로 “통화 중 제재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고 공언했다. 플린의 거짓보고로 펜스가 거짓해명을 한 셈이 되었다.
1월26일 연방법무부가 플린의 거짓말 사실을 백악관에 보고했다. 트럼프는 보고받았으나 펜스에겐 보고되지 않았다.
2월9일 전·현직 관리 9명의 말을 인용하여 플린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폭로한 워싱턴포스트는 2월12일 다시 플린에 대한 러시아의 협박가능성에 관해 보도했다. 2월13일 한 밤중, 플린은 전격 사퇴했다.
이렇게 그는 정치무대에서 퇴장했다. 그러나 플린의 사임만으로 덮어버리기엔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한 두 개가 아니다 : 플린이 러시아대사와 통화한 것은 트럼프 취임 전이다. 미국의 현행법은 민간인이 외교정책에 관여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플린은 중범죄로 기소될 것인가? 플린은 과연 러시아와의 제재해제 논의를 독자적으로 했을까? 상부의 지시를 받은 게 아닐까? 선거 중 플린은 러시아 해커들의 대선개입 시도에 도움을 주었을까? 트럼프는 왜 1월말에 플린의 거짓말을 보고받고도 징계하지 않았을까…“(대통령이) 무엇을, 언제 알았는가”라는 워터게이트 조사 당시의 유명한 질문도 여기저기서 인용되고 있다.
플린의 사임이 그 개인의 부적절한 행위에 대한 결과로 마무리될지, 트럼프와 푸틴의 ‘러시아 커넥션’으로 비화되는 악몽의 시작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것이 밝혀질 것인가가 관건이다.
트럼프는 러시아 커넥션을 일축하며 ‘정보유출’이 더 큰 문제라고 우기지만 조짐은 별로 좋지 않다. 본격적인 조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정보당국의 조사도 계속 중이고 공화당 의회 역시 전면조사 착수를 외면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정보유출’도 이쯤에서 끝날 기세가 아니다.
트럼프가 통치 현실의 벽을 인정하고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도 있다. 보다 합리적인 안보라인 구축 등으로 혼돈에 빠진 백악관을 재정비하는 한편, 의회와 생산적인 타협의 관계를 수립한다면 그의 장악력은 플린의 사임을 계기로 한층 강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그의 표밭이 열광해온 아웃사이더가 인사이더로 진화하는 것을 의미하는데…가능할까?
“노-드라마 오바마 시대가 가고 올-드라마 트럼프 시대가 왔다”를 매일 실감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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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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