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175, 아들 부시 148, 빌 클린턴 235, 아버지 부시 130, 그리고 레이건 349…무슨 숫자일까. 최근 대통령들의 행정부가 연방대법원에 섰던 회수로 USA투데이가 집계한 것이다. 이제 막 취임했지만 극단적으로 폭주하는 트럼프의 넘버도 만만치 않게 높아질 것이다.
한 대통령과 그 행정부 정책의 운명이 대법원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대부분의 대통령들이 재임 중 사법부와 크고 작은 충돌을 거듭하며 승소로 안도했고 패배로 좌절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대법원에 읍소해 헬스개혁법 ‘오바마케어’와 동성결혼 합법화를 주정부들의 위헌소송에서 구해냈지만, 추방유예 행정명령은 소송에 발목 잡혀 결국 무효화되고 말았다.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딜정책 일부를 무효화시킨 것도, 리처드 닉슨에게 워터게이트 테이프 제출을 명령한 것도, 빌 클린턴의 성추행 소송 연기신청을 거부한 것도 대법원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반이민 행정명령 소송을 둘러싸고 작심한 듯 매일 ‘사법부 때리기’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트럼프와 사법부의 ‘전쟁’은 백악관 입성 전부터 예상이 되었다지만 이렇게 빨리, 취임 3주가 채 안되어 갈등이 표면화된 것은 이례적이다. 트럼프처럼 판사에 대한 인신공격에, 사법부에 대한 노골적 비난으로 정면 싸움을 시작한 대통령도 거의 없었다.
그의 무차별 공격은 지난 며칠 계속되고 있다. 사실상의 무슬림 입국금지를 내린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을 일시 중단시킨 시애틀 연방지법 판사에 대해 지난 주말엔 ‘소위 판사’라는 자의 의견이 터무니없다면서 “무슨 일이 터진다면 그와 사법체계를 비난하라”고 트윗을 날렸는가 하면, 제9연방항소법원의 항고심이 열린 7일엔 “법원들이 매우 정치적”이라면서 대통령의 입출국 통제권한을 명시한 이민법 조항은 “불량 고교생도 이해할 것이다…법원이 존중받으려면 판사들이 할 일을 해야 한다”고 사법부 전체를 겨냥해 날을 세웠다.
트럼프가 ‘수치스럽다’고 비난한 항고심의 판결은 곧 나올 것이다. 이민명령의 일시 중단 판결을 얻어낸 워싱턴 주와 이에 불복해 항소를 제기한 연방법무부, 어느 쪽이 지든 거기서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기시감이 들지 않는가. 트럼프 행정명령의 운명도 현재 한 명이 공석 중인 연방대법원에 달렸다는 의미다.
지난해 오바마의 추방유예 행정명령이 텍사스 연방항소법원에서 시행중단 명령을 받은 후 대법원에 올라갔으나 보수 넷, 진보 넷의 대법관 8명이 동수표결로 맞서는 바람에 항소심의 판결이 준용되어 수백만 서류미비자들의 추방유예는 무산되어 버렸다.
보수적 주들이 민주당 대통령의 친이민 행정명령에 도전했던 그때와 반대로 이번엔 진보적 주들이 공화당 대통령의 반이민 행정명령에 도전하는 소송이다. 현재로선 제9항소법원의 진보적 벤치 구성으로 보아 트럼프의 패소가 조심스럽게 점쳐지고 있다.
대법원에 보수파 1석만 더해진다면 트럼프 이민명령이 되살아날 가능성은 부쩍 높아진다. 이미 닐 고서치 보수성향 판사를 지명해 놓은 트럼프에겐 막연한 희망사항이 아니라 눈앞에 현실이다. 문제는 시간이다. 민주당이 필사적인 저지를 공언한 상원의 고서치 인준이 트럼프의 뜻대로 쉽게, 빠르게 진행될 것 같지 못해서다.
사실 고서치는 자질과 양식을 충분히 갖춘 법관으로 평가받는다. 공화당 대통령의 지명자로 무난히 인준 받을 수 있는 보수성향의 젊은 판사다. 연방항소법원 판사로 지명되었을 때엔 상당수 민주당 의원들도 그의 인준에 찬성표를 던졌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상적’ 시기가 아니다.
대법원에 공석이 생긴 것은 지난해 2월 보수파 앤토닌 스칼리아 대법관이 사망하면서였다. 당시 오바마는 중도성향 메릭 갈랜드판사를 지명했지만 공화당이 새 대통령이 지명해야 한다면서 인준 청문회 자체를 열지 않았다. 1년 가까이 공석을 남겨둔 전례 없는 파행이었고 민주당은 ‘도둑맞은’ 대법관 석이라며 고서치에 대한 인준거부로 ‘보복’을 다짐해 왔다.
여기에 반이민 행정명령의 최종판결까지 걸리게 되었으니 인준전쟁이 더욱 뜨거워질 것은 불 보듯 훤하다. 민주당은 그가 트럼프에 맞서 ‘독립적인 견제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집중 추궁하겠다고 벼른다. 합법적으로 의사진행을 방해하는 필리버스터까지 동원해 저지한다는 전략도 세웠다.
그러나 민주당의 입장은 간단하지가 않다. 필리버스터를 막으려면 상원 100명 중 찬성 60표가 필요해 52석의 공화당에겐 역부족이지만, 찬성 51표로 처리할 수 있는 예외 조항 ‘핵 옵션’을 공화당이 택한다면 고서치 인준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다. 게다가 2018년 공화당 우세지역에서 재선을 치러야할 상당수 민주의원들이 고서치 반대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공화당에도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트럼프가 핵옵션을 압박하고 있지만 대법관 인준에서 상원의 전통과 권위를 손상시키는 편법동원은 트럼프의 ‘포퓰리스트’ 정당이 아닌 정통 공화당으로서는 별로 내키지 않는 선택이다.
민주당의 더 큰 우려는 고서치 이후다. 만약 공화당이 대법관 인준 문턱을 51표로 낮출 경우, 앞으로는 극우강경 판사의 대법원 입성도 가능해진다. 83세, 80세, 78세…고령의 현 대법관들이 물러날 경우, ‘트럼프의 대법원’은 7대2의 절대보수가 될 수도 있다.
요즘 진보진영은 고서치 인준을 저지하라고 민주당의원들을 압박하며 한 목소리로 아우성치고 있다. 그러나 그 아우성은 지난 11월 전에 더 뜨겁게 단합했어야 했다. 대부분의 이민사회를 포함한 진보진영은 “선거는 결과를 낳는다”를 갈수록 절감하며 4년의 긴 세월을 보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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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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