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 첫 주말이 지난 후 이번 주 초 워싱턴 곳곳 진보진영의 화두는 단연 ‘여성행진’이었다. “의사당 복도와 의원 사무실, 휴게실과 공원의 벤치, 어디든 두 세 명의 진보운동가들이 모인 곳에선 같은 질문이 제기되었다”고 LA타임스는 전했다 :
워싱턴과 미 전국에서 열린 여성행진은 정치적 무브먼트의 역사적 전환점이 될 것인가? 아니면 그저 트럼프를 혐오하는 민주당 지지자들의 일회성 분노표출로 끝날 것인가?
트럼프 취임 바로 다음 날인 21일 미 전국 50개주와 세계 32개국에서 열린 673건의 트럼프 반대 시위행진은 대성공이었다. 예상을 초월한 엄청난 인파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워싱턴 50만, 뉴욕 50만, LA 35만(경찰 발표)에서 스코틀랜드의 인구 81명 에이그 섬의 22명까지 참가자가 300만에 달했다.
“우리 딸들의 미래를 위해, 우리 할머니들의 건강을 위해, 학대를 피해 도망가는 아내들을 위해, 힘겹게 투 잡을 뛰어도 늘 생계에 허덕이는 엄마를 위해, 인종과 종교와 성적취향으로 차별당하는 소수계를 위해, 삶 자체를 위협받게 된 드리머들을 위해…” 이들과 트럼프에게 공격당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위기에 처한 지구를 살리기 위해, 대통령의 여성비하가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아들에게 가르치기 위해…거리로 나온 여성과 남성들은 여성의 권리,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며 함께 행진했다.
(그런데, 도대체, 더 없이 저속한 막말로 여성을 계속 비하하고 소수계를 공격해온 트럼프의 당선이 믿기 힘든 현실로 나타날 때까지, 이 거대한 에너지와 넘쳐나는 열정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 행진의 열기는 뜨거웠고 파워는 강력했으며 메시지는 명확했다 - “우리는 무시당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의 권리와 민권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메시지보다 중요한 게 있다. “행진 이후, 그 다음”이다. 이날의 행진이 과연 의미 있는 정치적 변화를 낳는 시민운동, 풀뿌리 무브먼트로 이어질 수 있는가이다. 6년 전 세계적 공조현상을 일으키며 몇 달 간 지속되었던 ‘월가 점령’과 ‘흑인생명도 중요하다’의 시위에선 좌절되었던 벅찬 과제라고 뉴욕타임스는 경고한다.
여성행진의 다음을 위한 플랜과 노력은 이미 시작되었다. 행진이 끝난 후 토요일과 일요일 지역운동가들을 위한 훈련 워크숍과 “여기에서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를 주제로 네트워킹 세션도 진지하게 개최되었다. 그러나 갈 길은 멀고 장애도 많다.
과거의 성공적 무브먼트엔 구심점이 된 핵심이슈가 있었다. 역사적인 베트남전쟁 반대와 민권운동은 물론이고 최근의 티파티도 정부지출과 증세 반대의 깃발아래 단합했었다. 그런데 ‘반 트럼프’라는 공동의 목표로 손잡긴 했어도 이번 행진 참가자들의 이슈는 낙태권에서 환경보호, 동등임금에서 이민개혁에 이르기까지 제각각으로 다양하다. 어떻게 이들을 아울러 에너지를 응집하는 무브먼트로 이끌어갈 것인가가 우선 과제다.
강력한 리더의 부재도 풀어야 할 숙제다. 행진의 주최자들은 무명에 가깝고, 아직 대 트럼프 전략조차 정비하지 못한 듯한 민주당 지도부는 행진에도 거의 참여하지 않은 채 관망상태다.
사실 이번 행진의 성공은 사기가 저하된 민주당에겐 뜻밖의 ‘선물’이다. 일부에선 벌써부터 여성행진을 ‘민주당의 티파티’로 기대하기 시작했다. 2009년 새 대통령 오바마에 대한 반대로 시작해 미 전국을 휩쓸었던 우파의 대규모 풀뿌리 운동 티파티는 결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의 참패를 몰고 온 정치적 파워로 부상했었다.
여성행진은 선명한 보수이념으로 단합되었던 티파티와 물론 크게 다르다. 티파티는 성공했고 여성행진의 다음이 어떻게 이어질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당시의 티파티 못지않게 여성행진의 반 트럼프 정서는 뜨겁게 끓고 있고, 당시의 오바마 행정부가 그랬듯이 지금의 트럼프 행정부도 이들의 분노와 에너지를 평가절하하며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트럼프가 한 마디 던지기는 했다. 물론 트윗으로 날렸다 - “…이들은 왜 투표를 하지 않았나…”
아마 대부분의 행진 참가자들은 투표를 했을 테니까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항의 시위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투표”라고 조나단 짐머맨 유펜 교수는 강조한다. ‘선거엔 결과가 따르는 법’이니 트럼프 행정부는 패자들의 불평으로 행진을 계속 무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음 선거는 멀지 않았다.
행진의 모멘텀도 그 자체로는 오래가지 않는다. 열정이 식기 전에, 에너지가 소진되기 전에 정치적 변화를 가져올 무브먼트의 자산으로 다져놓지 않으면 ‘역사적’ 여성행진은 그저 자기만족의 일회성 감정 분출로 끝나고 말 것이다.
‘성공적 여성행진, 그 다음’에 대한 전망은 상반된다. 곧 사라질 신기루로 일축되기도 하고, 좌절한 진보의 새로운 내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래도 일단은 여성행진이 보여준 결의와 동지애, 에너지와 열정이 다시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에 대한 희망을 가져도 좋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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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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