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거의 20년간 회원으로 있는 애난데일 로타리 클럽은 매주 수요일 점심시간에 모임을 갖는다. 로타리 클럽은 “Service Above Self”, 즉 “초아(超我)의 봉사”를 모토로 하는 단체이다. 그러나 봉사 외에 회원들간에 친목도 도모하고 유익한 정보도 교환한다.
애난데일 로타리 클럽은 그래서 그러한 정보 제공 차원으로 거의 매주마다 클럽 회원이나 외부 인사를 초청해 회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프레젠테이션을 갖는다. 나도 과거에 교육위원회와 관련된 이슈는 물론 바둑을 소개하는 프레젠테이션을 하기도 했다. 사실 바둑이 신기했던지 또 한 번 해달라는 부탁이 있어 이번달 말에 한번 더 하기로 했다. 그런데 지난해 12월의 프레젠테이션 중에는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있었던 ‘진주만 공격’의 경험담 소개가 있었다.
진주만 공격의 경험담을 물론 처음 듣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경험담에는 대부분 그 공격이 가져다 준 피해의 규모가 포함된다. 당시 사망한 수 많은 군인들과 가족들을 위시해서 부상당한 군인들이 겪은 고통과 미국이 정식으로 참전하게 되어 미국 전체가 전시체제로 전환되는 얘기도 듣는다. 또한 가끔은 일본계 미국인들의 격리수용 얘기도 듣는다. 그리고 그뿐 아니라 일본군의 기습공격도 당연히 거론된다. 기습공격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사실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이기에 정식 선전포고부터 하고 정정당당하게 싸워야 할 필요가 있느냐고 자문하면서도 비겁하다 생각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얘기들을 들을 때면 참 묘한 감정이 든다. 내가 일본인도 아니고 누가 나를 쳐다보거나 추궁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몸이 움추려 드는 것 같다. 선전포고 없는 비겁하다시피 한 기습공격, 그리고 전쟁 중 일본군이 저질렀던 잔혹한 행위들에 대해 내가 왜 일말의 죄의식을 느껴야 할까? 단지 같은 아시아인이라는 점에 기인한 필요 없는 피해 의식임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본 사람이 아니다”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실제로 지난 달 그 프레젼테이션이 다 끝난 후 질문과 코멘트 시간에 결국 한마디 하고 말았다.
“진주만 공격은 일본 제국의 확실한 멸망, 그리고 나 같은 한국인들에게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희망의 시발점이 되었다. 미국이 일본의 항복을 받아 냈을 때,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 어른들은 광복의 감격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렇기에 미국과 미국인들에게 진주만 공격에서 당한 피해와 그 후의 참전에서 보여 준 노력에 감사한다.” 물론 나는 일본 사람이 아니니 혹시 나를 쳐다보진 말라고 소리칠 수는 없었지만 결국 에둘러서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양한 인종들이 어울려 살면서 또한 인종적 갈등을 겪는 이곳 미국 사회에서 이래서 집단 죄의식이나 우월감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간다. 그래서 백인 경찰의 흑인 구타 뉴스를 듣거나 과거의 노예제도, 흑인 차별이 거론 될 때 직접적 연관이 없으면서도 단순히 자신의 피부 색깔 때문에 일정한 감정을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통계적으로 높은 흑인들의 범죄율, 복지혜택 의존도, 교육 부족 얘기가 나올 때 흑인들이 집단적 열등의식을 표출할 수도 있겠다고 느낀다. 비(非)아시아인이 중국인 흉을 볼 때 중국인이 아닌 한국인들도 기분 나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진정한 인종적 화합을 이룬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이러한 집단의식을 타파해야 하는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자신의 피부 색깔과 인종적 배경을 의식한다는 자체가 결국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집단의식이 존재하는 한 결국 진정한 인종적 화합을 이루지 못 할 것이다. 미국에서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과 미국에서 태어난 두 아들 녀석을 보면서 과연 어떻게 해야 인종적 화합을 이루고, 집단의식을 거론하지 않을 수 있을지 새해 벽두부터 곰곰히 생각해 본다. 아니면 그 문제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기에 아예 포기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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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룡 변호사 페어팩스 카운티 교육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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