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 몇 달 동안 페어팩스 카운티 교육청의 성인과 지역사회 교육부(Adult and Community Education)에서 제공하는 스페인어 기초반에 등록해 공부했었다. 주중에는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어 토요일 수업을 들었는데 12주 단위를 한 학기로 해서 지금까지 두 학기를 마쳤다.
스페인어 공부의 필요를 느낀 것은 사실 오래 전부터였다. 그러나 그 동안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가 지난 여름에 큰 마음 먹고 시작했다. 대신 토요일 수업이다 보니 토요일 스케줄이 자유롭지 못해졌다. 그래도 보람을 느낀다. 왜냐하면 페어팩스 카운티 공립학생들 중 거의 4분의 1이 히스패닉인데, 교육위원으로서 아주 기본적 인사 정도는 스페인어로 할 필요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야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학생들과 부모들에게 다가가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매 번 숙제를 미리 못하고 수업 당일 아침에 했다. 그것도 집에서는 정신 집중에 자신이 없어 동네 맥도날드에서 말이다. 맥도날드에서 숙제를 하다 보면 그 곳의 히스패닉계 종업원들에게 한두 가지씩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발음이나 간단한 문장 번역에 도움을 청하면 아주 반갑게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때로는 좀 더 깊은 도움이 필요할 경우도 있었다. 일하는 사람들을 오래 붙들고 있을 수 없어 혹시 손님들 가운데 히스패닉계가 없나 두리번거리기도 했지만 실제로 도움을 청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내가 즐겨 앉는 자리 바로 앞에 히스패닉으로 보이는 남자가 오래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도 보통 3시간 정도는 머무는데 그 사람도 줄곧 앉아 있는 것이었다. 차림새를 보니 일용직 건축 노동자처럼 보였다. 아마 그 곳에서 일감 줄 사람을 찾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 되었다. 그런데 3시간 이상 일감을 못 찾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다 초조해졌다.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마시던 음료수를 계속 다시 채워 마시면서 핸드폰 음악을 듣기만 했다.
그 사람에게 몇 주 째 눈인사만 하다가 하루는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 보기로 했다. 숙제인 스페인어 대화 본문을 한 번 읽어 볼테니 발음을 교정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내가 보여 주며 읽어 나가고 있는 내용을 못 알아보는 듯 했다. 번득 그 사람이 문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히스패닉계 주민들 가운데 교육을 못 받아 말은 하지만 글을 못 읽는 사람들도 제법 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학생들도 많이 있다는 보고를 접했던 생각도 났다. 그 날 나는 그 사람이 혹시 당황할까 봐 못 읽는다는 것을 눈치 챘음에도 불구하고 모른척하며 고맙다고 인사하고 마쳤다.
그런데 그 다음 주 토요일 같은 장소에서 그 사람이 어느 백인 손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 그 백인은 그 사람에게 애플파이도 건네주는 등 친한 사이처럼 보였다. 그 백인이 일감을 주나보다 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내가 그 백인에게 다가가서 어떤 사이냐고 조용히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그냥 오랫 동안 맥도날드에서 만난 사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일감을 찾는게 아니고, 가까운 곳에 사는데 토요일에는 집에서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산책 겸 맥도날드에 와서 아침도 먹고 좋아하는 음악도 들으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었다. 자기는 그가 애플파이를 좋아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냥 인사차 가끔 사준다고 했다.
나는 내친 김에 그 사람이 스페인어를 못 읽는 것 같은데 혹시 그가 문맹자냐고 물어 보았다. 그런데 아니라고 했다. 심지어 그 사람은 히스패닉도 아니란다. 필리핀 사람이며 스페인어는 못 하지만 대신 영어는 좀 한다고 했다. 맙소사! 나는 그냥 그의 차림새만 보고 그가 히스패닉계 일용직 건축 노동자이며 문맹자라고 단정해 버린 착오를 범한 것이다. 너무 미안하고 창피했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고 학생들과 주민들에게 종종 얘기해 온 이민자 출신 교육위원인 나 자신도 전형적인 선입견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
문일룡 변호사 페어팩스 카운티 교육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