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아침 여섯시가 못되어 집을 나선다. 그 시간은 한여름에도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맑은 날에는 담청색 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남편이 이렇게 새벽어둠 속에서 출근하고 난 다음부터 아침이 환하게 밝아올 때까지가 하루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에 나는 서둘러 커피를 만들어 들고 나만의 지성소로 문을 열고 들어가듯 문을 열고 덱으로 나가서 아침노을이 동편 하늘의 어둠을 들추고 하늘 전체로 서서히 번져갈 때까지 어둠 속에서 가만히 앉아있곤 한다. 왜 이때를 좋아하는가 묻는다면 딱히 설명하기 어렵다. 이상하게도 나는 하루 중에 이때가 지나가고 모든 사물이 아침의 환한 빛 아래 모습을 드러내면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남은 날들을 운다는 김영랑의 시가 생각나면서 내 하루가 다 지나갔다는 일종의 아쉽고 서글픔 같은 것을 느끼곤 한다.
동트기 전의 어둠이 가장 어둡다고 하지만 이때의 하늘은 검다기보다는 푸른 빛을 띤 투명한 어둠이고 하늘은 나무와 지붕들의 검게 가라앉은 실루엣보다 한층 옅은 검은색이다. 밤이슬에 흠뻑 젖어있는 의자를 수건으로 닦아내고 앉으면 어슴푸레한 눈앞으로 화분의 꽃들과 뒤뜰에 있는 전나무의 구불구불하게 뻗어 올라간 가지들이 보이고, 조금 더 떨어져 있는 산책길 옆의 뽕나무와 아카시아 나무들의 실루엣도 눈에 들어온다.
살갗에 닿는 바람은 서늘하고 적당한 물기를 머금은 공기에는 계절 꽃들의 향기가 섞여 있다. 고개를 들면 바로 위에 별들이 떠 있다. 그리고 소리들, 봄 여름 동안에는 새들의 울음소리가 새벽하늘에 가득했었고 밤이 길어지는 이즈음엔 새들이 늦잠을 자는지 풀벌레 소리가 더 요란하다. 밤새 울었을 풀벌레들은 이 시간까지도 쉬지 않고 목놓아 울고 있다. 머지않아 겨울이 온다는 걸 알기 때문일까. 소리에 어딘가 절박함이 묻어있다. 식민지 시대를 부끄러움으로 살았던 젊은 시인은 벌레들이 밤새워 우는 건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기 때문이라고 했었다. 나도 눈에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나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내 안의 어떤 염원을 대신 울어주는 아우성인 것 같기도 해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본다.
데크에는 분꽃 화분이 있다. 낮 동안에는 꽃잎을 오므리고 있다가 저녁 무렵에야 얼굴을 활짝 피는 꽃. 이 시간에 분꽃은 어둠 속에 걸어 둔 작고 노란 등처럼 켜져 있다. 앞뜰에서 자라던 이 꽃을 화분에 옮겨심어 덱으로 가져왔을 때 몇 날을 축 늘어져 가망 없는 모습이었는데 고맙게도 며칠 후에 다시 제 모습으로 살아나서 나는 대견해 하며 공들여 키워왔다. 내가 늘 late bloomer이라고 생각하는 아들을 연상시키는 꽃이어서 더욱 애착이 가고 벌레를 먹어 꽃봉오리가 피기도 전에 시들 때는 약을 쳐주면서 마르고 예민한 것까지 아들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전에 이런 생각을 지인들과 나누고 그분들로부터 분꽃은 예민하지도 여리지도 않으며 잡초처럼 생명력이 강한 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내심 충격을 받았다. 이런 반전이라니, 분꽃처럼 내가 아들을 잘못된 이미지 속에 가두고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아들은 어쩌면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는 잡초일 수 있으며 보이지 않는 곳에 분꽃처럼 크고 단단하게 여문 씨앗을 품고 있는데 내가 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새삼스러운 자각이 있었다.
아무튼 나는 이렇게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둠 속에 앉아서 반성도 하고 먼 곳의 식구들을 마음으로 불러오기 도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그러나 정말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있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크다. 텅 빈 상태로 얼굴을 스치는 바람과 어두운 허공의 청회색 구름, 그 켜켜이 다른 푸른 빛, 축축한 새벽 냄새와 자연의 온갖 소리만을 감각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때의 어느 순간에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과 나 사이에 경계가 없어지고 그 너머가 손에 닿을 수 있게 가까워진 것 같다. 글로만 읽은, 순간이 영원과 닿는다는 것이 그런 느낌인지 모르겠으나 텅 빈 것 같은데 충만하고, 맑은 슬픔 같은 것, 어딘가 본향을 향한 그리움과 향수 같은 것이 그 순간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드문 경험은 나이가 들면서 더 희귀해졌다. 대부분 몸만 덱에 앉은 채로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과 걱정들이 꼬리를 물다 보면 어느새 어둠이 옅어지면서 동편 하늘이 훤해오고 옆집 개가 바깥에 나오는 시간이 되고 만다. 그러면 나는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집안으로 들어오며 어쩔 수 없이 내 하루는 다 가고 말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새벽이야 늘 오지만 내 지성소의 시간은 늘 있지 않다. 날이 너무 빨리 밝는 여름에는 나가기도 전에 창밖이 훤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피곤해서 남편이 출근하자마자 곧바로 침대로 직행하여 늦잠을 자는 날도 있으며 비가 오거나 눈이 와서 데크에 나갈 수 없는 날도 있기 때문이다. 더우기 언제라도 다시 일을 하게 되면 그런 시간은 다시 그리움으로나 존재할 것이므로 나는 상황과 무관하게 언제든지 문을 열고 들어가서 내 좋아하는 시공간을 불러올 수 있는 방이 있었으면 하는 상상을 한다.
언젠가 읽은 글이 생각 난다. 오랫동안 명상을 해온 분이 쓴 글이었는데 마음 속에 혼자만 들어가는 방을 만든 다음부터 그는 따로 별도의 시공간을 찾지 않아도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무 때나 그곳에 들어가서 고요하게 있을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명상을 하진 않지만 종종 그 글과 방을 생각한다. 그럴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비좁고 복잡한 내 마음의 공간 어느 자리에 어떻게 새벽의 푸른 어둠과 고요한 바람만이 흐르는 텅 빈 방 하나를 마련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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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진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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