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 끝으로 내모는 것은 상황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이다." (노년의 빅토르 프랭클)
사람이 한 세상을 살다보면 이것이 내 인생의 끝인가 싶도록 절망적인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어쩌면 천길 만길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자신, 고함을 질러도 들어 줄 사람이 없고 손을 뻗어 봐야 잡아 줄 사람도 없는 현실, 그것을 ‘끊어질 絶’ ‘바랄 望’을 써서 절망(絶望)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운명과 그 시련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나게 된다. 신앙인은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다.
지난 번 칼럼 ‘절망에서 희망으로’의 주인공 빅토르 프랭클 박사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서 잘 나가는 정신과 의사였다. 그런데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얼마후 유태인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체포되어 수용소에 갇힌다.
체포되기에 앞서서 그는 신경과학자로서 미국으로 망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부모에게는 비자를 내주지 않자, 프랭클 박사는 혼자 떠나지 않고 부모와 함께 오스트리아에 남기로 결정했다. “삶에 절대적 의미란 없다. 오직 각자의 삶에 따라 각자의 의미가 있을 뿐이다.” 수용소의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의 가족은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를 네 번이나 옮기는 도중 뿔뿔이 흩어졌다. 수용소에서 늙은 아버지가 제일 먼저 돌아가셨다. 그의 어머니는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돌아가셨고, 그의 사랑하는 아내 틸리는 베르겐-벨센 수용소에서, 동생 월터는 강제 노역 중에 사망하였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다. 아무런 이유없이 인생이, 그리고 가정이 이렇게 무참하게 망가진 것이다. 프랭클 가족 뿐이 아니다. 당시 모든 유태인들의 삶이 그렇게 파괴되었다.
수용소에서는 매일 가스실에서 죽일 사람들을 추려서 뽑아간다. 그래서 모두들 두려움으로 나날을 보낸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한 빵 한 조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가스실로 가는 대열에 뽑히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다. 병든자, 노동력을 상실한 자를 우선적으로 뽑아 가스실로 보냈기 때문이다.
프랭클이 수용소에 수용되자 먼저 와있던 친구가 그를 알아보고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와서 중요한 정보 즉 ‘살아 남는 비결’을 알려 주었다. “매일 같이 면도를 하게. 그러면 더 젊어 보일 거야. 뺨을 문지르는 것도 혈색이 좋아 보이게 하는 한 방법이지. 자네들이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단 한가지 방법 밖에는 없어. 일 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그는 언젠가 읽었던 니체의 글 중에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는 구절을 기억했다. 물 한 컵이 배급되면 반잔은 마시고 나머지 반잔으로 세수와 면도를 했다. 면도칼이 있을 리 없다.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하니 얼굴은 상처 투성이였다. 그러나 살아야 했다. “이렇게 의미 없이 죽을 수 없다.”
그는 수용소의 비참한 현실 속에서 인간에 대한 관찰과 이해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 결과가 바로 그의 저서 ‘한 심리학자의 강제 수용소 체험기 (Die Psychotherapie in der Praxis)’ 영어 번역판으로는 ‘존재의 의미를 찾는 인간의 추구(Man’s Search for Meaning)’로 필자가 주위에 여러분에게 꼭 권하고 싶은 교양서적 중 하나이다. 한글로도 여러 유사한 제목을 가지고 출판되었다.
어떤 사람은 죽음이 눈 앞에 다가와도 고결한 정신을 가지고 의연하게 죽어갔지만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채 짐승이 되면서 죽어갔다.“성자처럼 죽을 것인지, 아니면 돼지처럼 죽을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이른바 존재의 의미를 찾는 그의 심리학 로고테라피(Logotherapy)가 이러한 절망적인 극한 상황 속에서 정립된 것이다. ‘로고스’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 단어이다. ‘로고텔라피’는 삶의 의미를 찾아주는 심리 치료법인 것이다.
필자가 찾은 책의 주제의 하나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 또 하나는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느냐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느냐?” 하는, 정신세계에서 코페르니쿠스 적인 발상의 변화인 것이다. 어쩌면 ‘삶’이라는 단어를 대자연의 섭리, 아니면 하나님으로 바꾸어 질문할 수도 있겠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가? 어쩌면 인생을 연극과도 비교할 수 있겠다. 배우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감독이 의도하는 바를 표현하는 것이다. 훌륭한 배우는 어떤 역을 맡아도 역할을 잘 소화시킨다. 역시 같은 생각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 부터 쓰임을 받는 도구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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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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