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한 캘리포니아 유권자들!” - 무려 17개의 주민발의안(Proposition)이 회부된 2016년 캘리포니아의 선거를 전한 지난달 뉴욕타임스의 기사는 이렇게 위로로 시작되었다.
워낙 민주당 텃밭이니 “힐러리냐, 트럼프냐”의 고민은 해봤자 소용이 없다 치자. 그러나 24년 만에 처음으로 새로운 연방 상원의원을 뽑게 되었는데 대결하는 후보가 둘 다 민주당이다. 두 후보의 면면을 잘 살펴서 선택하지 않으면 앞으로 수 십 년 후회할 수도 있다. 거기에 각 지역구의 연방 하원의원, 주 상·하원의원에 카운티 수퍼바이저와 판사들까지 이름도 생소한 후보들 중 누군가를 찍어야 한다.
연필 굴리기를 하듯 아무나 찍는 무책임한 유권자는 되기 싫은데…쌓여가는 불만과 회의가 폭발하는 것은 뒤 이어 쭉 늘어선 각종 주민발의안들에 이르러서다. 기호용 마리화나 합법화, 담배세 인상, 사형제도 폐지, 처방약값 제한 등 핫이슈들의 운명과 함께 포르노영화 촬영시 콘돔착용의 의무화 여부까지 결정해야 하는 17개의 주 발의안에 더해, 카운티와 시의 세금인상 등 온갖 난제가 기다리고 있다.
이쯤 되면 발의안의 홍수다. 도대체 주의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런 일 처리하라고 뽑아주고, 세금 내서 봉급 주는 것 아닌가. 더구나 주지사와 상하원이 모두 민주당인 캘리포니아는 전국에서 가장 생산성 높은 주의회 중 하나로 꼽힌다는데…
캘리포니아는 주의회에만 입법 권리를 주고 있는 게 아니다. 벌써 100년 넘게 중요한 입법이 투표소에서 이루어지는 오랜 전통을 고수해 왔다. 막강한 철도 및 목재 기업과 권력의 결탁이 심했던 19세기 초 히람 존슨 주지사가 이끄는 개혁파들이 직접 민주제를 허용하도록 주 헌법을 개정하는 발의안 제도 채택을 성공시킨 이후 발의안 주민투표는 캘리포니아 정치의 중요한 부분이 되어 왔다.
2014년 11월 선거까지 364개의 발의안이 투표에 회부되어 그 결과 주 헌법이 52차례나 개정되는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부결이 훨씬 많아 통과된것은 123개 뿐이다. 특히 1960년대엔 회부된 숫자조차 대폭 줄어들어 주춤해졌던 발의안 제도에 중요한 분수령이 된 것은 1978년 프로포지션 13의 통과였다.
고삐 풀린 세금인상에 견디다 못한 ‘납세자의 반란’으로 불리는 이 발의안으로 재산세 인상은 사실상 동결되었고 주 헌법엔 “증세 법안 통과엔 상하 양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는 개정조항이 더해졌다.
그러나 민의를 여과 없이 정치에 반영하기위해 채택된 발의안 제도는 오래 세월 남용과 오용으로 제 역할을 상당부분 잃은 채 지금은 오히려 대기업 등 거대 이익집단들이 자체 이익을 보호하는 편리한 장치가 되고 있다. 발의안 작성에서 수십만 유권자 서명 받아 투표 회부, 통과에 이르기까지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은 거대집단이 아니고는 감당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금년에도 약 1억 달러의 돈이 17개 발의안 찬반 전쟁에 쏟아 부어졌다.
때로는 정치가들의 도구로도 이용된다. 1994년 지지율 하락 중이던 공화당의 피트 윌슨 주지사가 불법체류자에 대한 공공혜택을 전면 금지시키는 프로프지션 187을 자신의 재선 캠페인에 엮어 당선된 것이 대표적 케이스다. 당시의 반이민 정서를 반영하듯 59%의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되었던 이 발의안은 후에 위헌판결을 받아 폐기되었다.
금년에도 차기 주지사를 꿈꾸는 두 명사가 발의안 지지에 적극 앞장서고 있다. 총기규제 강화안 프로포지션 63을 지지하는 개빈 뉴섬 부지사와 담배세 인상안 프로포지션 56의 주 스폰서인 억만장자 환경론자 톰 스테이어다.
발의안 제도에 대한 캘리포니아 주민들의 정서는 양면성을 띠고 있다. 너무 많다, 복잡하다, 혼란스럽다…불평은 끝이 없지만 공공정책연구소(PPIC) 여론조사에 의하면 70%가 이 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10명 중 6명이 주민들의 결정이 정치가들의 결정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괜찮은 정책 입안자”라는 자긍심이 상당하니 발의안 제도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지난주 내게도 224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책 같은’ 두툼한 선거 안내책자가 배달되었다. 들춰보는 순간 골치부터 지끈거린다. 시험공부 시키나, 이걸 다 읽으라고? 내용도 쉽지 않다. 전문적 용어로 극히 상세한 부분까지 기술하고 있어 보통사람에겐 혼란만 가중시킨다. (하긴 이득을 챙기려는 의도를 간파하지 못하게 유권자들을 혼란에 빠트리는 작전일 수도 있다)
그래도 자세히 읽어본다면 “섹스, 마약, 총기, 죽음 등 흥미진진한 토픽이 다 들어있다”고 UC샌디에고의 태드 코우서 교수는 위로한다. 통과될 경우 개개인의 입장에 따라 상반된 영향을 미칠 중요한 안건도 많다. 6건은 주 헌법 개정안이고 9건은 새로운 법의 제정이다. 당연히 주의회에서 면밀히 검토분석하고 폭넓은 공청회를 통해 충분한 토론을 거친 후 최대한 공정하게 결정되어야 할 사안들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인쇄와 우송에 1,500만 달러나 되는 세금이 들어갔다는 두꺼운 책자는 내 앞에 놓여 결정을 독촉하고 선거는 3주도 채 안 남았으니…‘10월의 어느 멋진 날’ 한나절쯤은 할애할 수밖에!
‘2016년의 숙제’ - 17개 발의안과 씨름해야할 캘리포니아 한인유권자 여러분의 행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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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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