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가 보수의 기수가 된다면 공화당은 그와 함께 자폭하게 될 것”이란 경고가 나온 것은 지난해 여름 트럼프 광풍이 대선판을 뒤흔들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표밭의 분노에 편승해 극단적 막말로 정상을 장악한 선동가 트럼프와 그를 혐오하고 무시해온 공화당 주류의 불편한 관계는 끊임없는 내분을 빚으며 반목과 봉합을 거듭해 왔다. 그리고 마침내 이 아슬아슬한 관계의 끈은 이번 주 들어 요란한 집안싸움을 만천하에 공개하며 툭 끊어지고 말았다.
당 서열 1인자는 대선후보를 버렸고, 후보는 자당에 전쟁을 선포했다. ‘위험한’ 후보에 대한 수많은 경고에도 대처의 책임을 유기해온 주요정당이 벼랑 끝 위기에 처한 것이다.
오랜 불화이긴 하지만 그래도 전면전은 최소한 11월 선거 이후로 미루기 원했던 공화당의 갑작스런 내전은 양당진영을 모두 놀라게 했다.
월스트릿저널이 정리한 내전 발발 전후의 닷새간 전쟁일지가 흥미롭다.
시작은 7일 오후 트럼프의 2005년 녹음파일 보도였다. 어느 대선후보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한 낯 뜨거운 음담패설로 가득 찬 내용이었다. 공화당 서열 1인자인 폴 라이언 연방하원의장 등을 포함한 각계의 비난이 쇄도하자 자정 무렵 트럼프는 마지못한듯한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1시간 후인 8일 새벽 분노에 찬 마이크 리 공화당 상원의원이 트위터로 트럼프 사퇴를 촉구했고 연쇄반응이 일어났다. 8일 하루 동안 “10대 딸의 눈을 보며 트럼프 지지는 차마 못하겠다”는 켈리 아요트, 당 지도부인 존 매케인과 존 던 등 상원의원의 트럼프지지 이탈이 줄을 이었다. 밤 9시30분 마지막 이탈자는 오하이오의 롭 포트먼 상원의원, 이로서 트럼프는 가장 중요한 경합주인 오하이오의 인기 주지사와 인기 상원의원의 지지를 모두 잃어버렸다.
대선후보 2차토론 날인 9일, 온종일 칩거하며 “비난과 배신을 견디어낸” 트럼프는 한층 호전적 태세로 토론에 임했다. 빌 클린턴의 성추문 관련 여성들을 대동한 기상천외의 토론 전 기자회견도 가졌다. 전 세계의 화제꺼리가 된 음담패설은 ‘라커룸 농담’으로 일축하고,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을 감옥에 넣겠다고 위협하며, 시종일관 사실여부와는 상관없이 공격에 치중한 그는 ‘힐러리 판정승’ 평가는 무시한 채 스스로 ‘승리’로 자평했다.
허둥댔던 1차토론 보다 확실히 나아진 트럼프의 2차토론 성적도 라이언에겐 별 효과가 없었다. 10일 오전 라이언은 의원들과의 전화회의를 통해 “더 이상 트럼프를 방어하지도, 그와 유세를 벌이지도 않을 것”이라며 “하원 다수당 유지에 주력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실상 대선후보를 버린다는 ‘폭탄’을 던진 셈이다.
가만히 있을 트럼프가 아니다. 당한 것은 10배로 보복한다고 공언해온 트럼프 발 폭풍트윗이 11일 아침부터 휘몰아쳤다. “라이언은 나약하고 무력한 지도자다…이제 난 족쇄가 풀렸다, 내 방식대로 할 것이다…불충한 공화의원들이 사기꾼 힐러리보다 더 골칫거리다. 그들은 이기는 법을 모른다, 내가 가르치겠다!” 분기탱천한 트럼프의 선전포고였다.
공화당 내전의 와중에서 힐러리의 승률은 치솟았다. 근소하게 앞서던 지지율 격차가 두 자리 숫자로 벌어지고, 당선에 필요한 선거인단을 ‘매직넘버 270명’ 보다 훨씬 더 확보했다는 분석들이 나오고 있으며 정치예측시장의 당선확률도 92%로 뛰어 올랐다.
“트럼프는 끝났다”는 해설이 잇달았다. 라이언도 의원선거에 집중하는 이유를 “힐러리에게 (민주당 의회를 가진 민주당 대통령이라는) 백지수표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함으로서 사실상 대선 패배를 인정했다.
공화당이 겁내는 것은 대선패배가 아니다. 트럼프의 참패로 상하원 의원들까지 동반 추락하는 부수적 피해다. 게다가 이제 ‘잃을 것 없는’ 상황에 고삐까지 풀린 트럼프가 어떻게 폭주할 지도 두렵다. 이미 트럼프는 선거제도에서 여론조사까지 모든 게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며 힐러리와 당 주류를 타겟으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격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가장 전전긍긍하는 것은 재선에 나선 공화당 의원들이다. 지지 철회에 분노한 트럼프 표밭의 거부 보복도 두렵고, 트럼프를 혐오하는 중도표밭의 염증 기권에 대한 우려도 떨쳐내기 힘들다. 이러다간 상원은 물론 꿈에도 걱정해보지 않은 하원의 주도권마저 흔들릴까, 위기감이 팽배해지고 있다.
2012년 대선 후 공화당이 작성한 패인분석 보고서는 소수계 유권자를 적극 포용하는 ‘빅 텐트 정당’으로의 탈바꿈을 차기 대선승리의 최우선과제로 꼽았었다. 그러나 쇄신의 의지가 약했던 지도부와 트럼프의 출현으로 2016년의 공화당은 반대로 치달아 왔다.
사면초가에 몰린 트럼프는 12일에도 환호하는 지지자들을 향해 “난 절뚝거리면서도 결승점을 넘을 것”이라며 포기 없는 강행군 유세를 천명했다. 패배한다 해도 트럼프와 백인중심의 트럼피즘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트럼프가 차기 대선후보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11월의 선거가 당장의 위기라면 더 큰 문제는 선거 이후다. 현재의 전망대로 패배했을 경우, 사기는 땅에 떨어진 채 산산조각 난 당을 누가 어떻게 그 암울한 상황에서 건져낼 것인가. 당장은 내분을 봉합할 전략도, 리더도 보이지 않는다.
선거는 26일밖에 안 남았는데…공화당의 고민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
박 록 주필>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