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서 감지되는 반갑지 않은 변화들이 있다. 노안, 주름, 백발 등등 그 가운데 기억력 감퇴도 포함될지 싶다. 요즘 가끔 ‘기억’ 때문에 당혹해 하는 일들이 종종 있다. 길거리에서 오랜만에 지인을 마주칠 때 이름이 입안에서 뱅뱅 돌고 나오지 않아 민망한 경우가 이제 다반사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에 그나마 위안을 받는다.
물론 우리가 비록 망각의 바다에 산다고 할지라도 모든 망각을 다 창조주의 섭리나 축복으로 합리화하거나 당연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뇌질환으로 오는 건망증이나 치매로 인한 망각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질병에서 오는 망각이 아니라면 아름답고 의미 있는 기억은 망각의 급류에서 건져내야 할 것이다.
모든 망각이 다 바람직한 것이 아닌 것은 사회 공동의 기억에도 해당된다. 사회적 혹은 역사적 망각이 그런 경우이다. 사회적 사건에 대한 사회적 망각은 그 고통과 폐해가 어떤 질병보다도 큰 사회적 중증 질병이다. 고국의 세월호 참사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대충 덮고 역사의 망각에 맡기려는 세력이 있다. 아직도 세월호 참사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반면 이에 맞서 진실을 밝히고 책임자를 규명하고, 희생자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똑같은 참사나, 역사의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사회적 망각의 기억화를 위한 의미 있는 몸짓이다.
들여다보면 개인이나 사회나 망각의 바다에서 건져내 잊지 말고 고이고이 혹은 분명히 기억해야 할 일들이 적지 않다. 어중 되서 그런지 사람이 비록 망각의 존재임을 알고, 역사 또한 망각과 기억의 대결임을 알면서도, 막상 망각(잊힘) 앞에 그리 익숙하지 않다. 누군가에게 잊혀진 존재로 확인될 때 마음 한편이 서운하고 허전하고, 나를 잊지 않고 반겨주는 그 기억에 기뻐하며 사는 필부(匹夫)의 모습이다.
사실 누가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 준다는 것은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다. 오래전 일이건만 ‘망각의 곡선’(Forgetting curve) 법칙을 넘어 나를 혹은 그 때 그 일을 기억해 준다는 것은 그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세상의 각종 정보로 가득 찬 그의 복잡한 마음 안에, 내가 좋은 기억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가슴 벅차도록 흐뭇하고 감사한 일이다.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망각에서 의미 있는 기억을 길어 올려야 한다. 기독교와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경은 ‘잊지 마라’(신명기 6장12절) 곧 ‘기억하라’는 말씀을 자주 한다. 기억이 있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도 기억을 통하여 존재한다. 기억을 통하여 삶으로 이어진다. 매우 궁하고 곤란할 때 은인이 베푼 고마운 일도 뼈에 새겨 ‘잊지 않겠다’는 기억의 다짐을 통하여 간직된다. 역사의 역행을 막는 것도 역사에 대한 제대로 된 기억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망각의 바다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많지만, 살아오면서 받은 따뜻함, 고마움, 친절, 은혜, 역사의 아픔과 부끄러움, 민족의 자랑스러운 쾌거, 의미 있는 일들과 고마운 분들은 마음에 고이 간직하여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
아주 먼 훗날 언젠가 사람들 사이의 굳센 마음의 맹세도, 비문도, 묘지석도, 거대한 돌탑도 사라지고, 세상의 누구도,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나를 영원히 잊지 않고 마음에 담을 수 없을 것이다. 어쩔 것인가? 그럼에도 변함없이 기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기억은 오늘 여기 살아있는 사람의 거룩한 의무이고 예의이다.
기억은 어제와 오늘을 잇는 자리이며, 영원을 만나는 자리이기도 하다. 우리는 절대자나 진리에 대한 기억을 통하여 망각의 법칙을 초월한 저 너머의 세상을 만난다.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이사야 44:21) 성경은 망각 너머의 세상, 잊음이 없는 세상을 말씀한다. 하느님 안에는 잊음이 없다.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기억하며 산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함의 세계와, 고마운 이웃과, 역사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기억은 서로 함께 있음이요, 여기 살아있음이요, 고마움이다. 나를 기억 해 주는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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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석 성공회 워싱턴한인교회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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