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시청률이 가장 높았던 부통령 후보 TV토론은 거의 7,000만 명이 지켜본 2008년 공화당 새라 페일린과 민주당 조 바이든의 토론이었다. 그해 버락 오바마와 존 매케인의 토론을 능가해 유일하게 대선 후보 토론을 압도한 부통령 후보 토론으로 꼽힌다. 매케인의 판단력이 의심될 정도로 자질부족이 드러났는데도 극우보수 표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어온 페일린의 흥행성 덕분이었다.
시청률은 훨씬 저조하지만 금년 부통령 후보 토론에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토론 당사자는 아니지만 토론의 핵심이슈가, 끊임없이 자질부족에 시달리면서도 표밭의 인기를 누리며 선거 흥행 보증수표로 뜬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였기 때문이다.
4일 밤 버지니아에서 열린 민주당의 팀 케인과 공화당의 마이크 펜스의 부통령 후보 토론은 지루할 것이라는 예상보다는 훨씬 활기차고 나름 불꽃도 튀었던 흥미로운 공방전이었다. 트럼프의 세금회피와 막말비하, 힐러리 클린턴의 신뢰도, 안보와 경제 등 금년 선거의 핫 토픽만이 아니라 지난 주 대선 후보 토론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았던 이민과 낙태, 소셜시큐리티까지 토론의 주제도 다양하게 짚어갔다.
이번 토론의 승자는 펜스로 나타났다. 승패의 우선 기준은 눈에 보이는 스타일이었고, 침착하고 절제된 태도로 일관한 펜스가 조급하고 공격적인 케인을 누른 것이다. 토론직후 CNN의 여론조사도 48% 대 42%로 펜스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런데, 케인 외에도 또 하나 눈에 뜨이는 패자가 있었다. ‘진실(truth)’ - 정치분석 사이트 복스가 꼽은 패자다.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을 정면 부인하는 펜스의 천연덕스러운 거짓말도 토론평가에서 마이너스 아닌 플러스로 작용한 토론의 본질에 대한 개탄 같기도 했다.
트럼프를 어떻게 얼마나 방어할 수 있을 지가 최대 관전 포인트였던 이번 토론에서 펜스의 전략을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정리했다 : 피하고 바꾸고 얼버무리라.
트럼프의 과거 논란 발언과 세금 기피 의혹 등 대답하기 힘든 질문과 공격이 가해질 때마다 그는 무시하며 피했고 얼버무리며 반격의 계기로 삼았으며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아예 대놓고 부정하거나 다른 말로 바꿔버리기도 했다.
트럼프는 물론 펜스 자신도 러시아의 푸틴을 오바마보다 강력한 리더라고 말했던 사실을 안했다고 부인하기도 했고 “일본과 한국도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란 트럼프의 발언도 “그런 말 한적 없다”고 일축했다. 멕시칸 이민을 강간범과 범죄자로 비하한 트럼프의 연설을 케인이 거론하자 “또 그 멕시칸 얘기냐”로 응수했고 “방어할 수 있느냐”는 케인의 반문에 “기꺼이 트럼프 편에 서겠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지 않았다. 펜스는 트럼프를 별로 옹호하지 않았다. 스트레스 받은 케인은 자신이 펜스에게 어떻게 트럼프 같은 사람을 옹호할 수 있느냐고 이날 밤 6번이나 말했다면서 “그는 자신이 옹호할 수 없는 사람에게 투표하라고 청하고 있다”고 공격했다.
트럼프 때리기를 작심한 케인이 무려 70여 차례나 끼어들기를 감행하며 도발했으나 펜스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계속 던져대는 미끼를 한 번도 물지 않았다. 온화한 표정과 확고한 어조로 자신의 주장을 직설적으로 전달하는 뛰어난 스타일과 그 어떤 말로도 트럼프를 설득력 있게 방어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아는 듯 했다. 복스는 이런 펜스를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불량상품을 팔아야하는 “매우 유능한 세일즈맨‘”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부통령 후보의 주요 역할 중 하나는 ‘인간 방패’다. 때로는 대선 후보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품위나 정치적 미래에 끼칠 손상을 감수해야 한다. 무례하다는 비난을 들을 만큼 공격적이었던 케인이 힐러리의 충실한 방패였다면, 펜스는 해야 할 방어를 포기하고 주요 어젠다에서 독자노선을 제시하며 트럼프와의 거리두기를 확실히 했다.
쏟아지는 트럼프 공격을 매번 힐러리 공격의 계기로 전환시킨 펜스의 작전은 효과적이었다. 트럼프 지지자들을 ‘개탄스런 집단’으로 비하한 힐러리의 발언을 거론하며 트럼프 아닌 힐러리가 ‘모욕으로 가득 찬’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고 반격했고 이메일 스캔들과 클리턴 재단, 민주당 행정부의 외교정책 실패 등 트럼프가 첫 토론에서 놓친 포인트를 차근차근 짚어갔다.
이날 토론에서 펜스는 케인만 이긴 게 아니었다. 트럼프보다 돋보였다. 첫 토론에서 힐러리에 밀리며 허둥대던 공화당의 대선 후보보다 훨씬 더 ‘대통령답게’ 보인 것이다. 당장 공화당 일각에선 “정·부통령 후보를 바꿔야한다” “차기대선의 기대할만한 주자다”라는 말들이 오가고 한마디 트윗이 일파만파 번지고 있다 - “케인은 2016년 부통령 후보로 출마 중이고, 펜스는 2020년 대통령 후보로 출마 중이다”
4일의 토론은 ‘펜스의 밤’이었지만 성급한 끼어들기 중간 중간에 케인이 남긴 소신도 인상적이었다. 자신의 신앙에 어긋나는 낙태권과 사형제도를 언급하며 “공직자는 자신의 종교관 때문에 타인의 권리를 제한해서는 안된다”고 단언했으며 “생명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펜스에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여성 자신이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라”고 상기시켰다.
이달 말이면 69세가 되는 힐러리와 70세인 트럼프의 대역으로 언제라도 투입준비가 완료된 부통령 후보로 57세의 펜스와 58세의 케인이 크게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며 한 번 뿐인 2016년 부통령 후보 토론은 끝났다.
둘 중 한 사람은 백악관으로, 다른 한 사람은 다시 험난한 선거판으로 보내게 될 선거가 이제 33일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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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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