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기가 너무 힘들다고들 한다. 어쩌면 너나 할 것 없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도무지 ‘내 모습 이대로 충분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TV/인터넷과 같은 미디어를 통해, 학교/직장 등의 사회생활을 통해 끊임없이 듣는 말은, 너는 더 아름다워져야 해, 살을 더 빼야지, 피부관리는 제대로 하고 있니? 너는 돈을 더 많이 벌고, 재산을 더 가져야 해, 학벌을 좀 더 키워야지, 젊을 때 뭐 하나라도 더 배워야지, 저 자리에 오르기에는 능력이 부족해, 더 노력하고 더 처세를 잘해야지 등과 같은 온통 ‘넌 아직 멀었어’ 메시지들이다. 벗어나 조용히 종교를 가져보려해도 부족하다는 메시지를 피하기는 어렵다. 종교 경전 지식이 부족하다, 신앙심이 부족하다, 정성이 부족하다, 선행이 부족하다, 기도가 부족하다, 부족하다, 부족하다… ‘너는 아직 만족 할 자격 없는 부족하고 못난 존재다’라는 부정적인 메시지에 질식될 지경이다.
자존감이 낮은 현대인은 TV와 잡지에 나오는 스포츠인, 연예인, 모델들, 미모와 패션센스를 겸비한 재벌갑부들을 선망한다. 그들의 완벽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모습을 보는 일은 나 자신의 부족하고 비참한 모습을 잠시나마 잊게 해 준다. 그들을 따라하면 나도 그렇게 될 것만 같다. 운동을 하고, 성형을 하고, 음식을 적게 먹고, 그들이 선전하는 멋진 물건들을 나도 가지고 싶다. 만져지지 않는 신기루같은 그 허상들이 내 삶의 롤모델이 된다. 신기루에 이르려고 애쓰다가, 얼마나 많은 현대인들이 강박적 운동중독, 성형중독, 섭식장애, 브랜드에 대한 지나친 집착 및 쇼핑중독과 같은 끝없고 답없는 정신질환의 사막에서 쓰러지는지!
자신을 세상의 기준에 맞추려고 온갖 고통을 감내하며 애쓰고 있는 사람들은, 타인을 보면 비판하고 싶은 마음만 든다. 세상 기준에 해박한 그들에겐 그것에 못 미치는 사람들의 단점이 눈에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기준을 향해 조금이라도 더 올라가려고 애쓰지 않고 안일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다. 타인의 개성이나 타고난 성향따위 존중, 수용할 마음같은 건 전혀 생기지 않는다. 건강한 관계가 뭔지 관심도 없다. 세상의 기준을 서로에게 확인시켜주고, 수군수군 남 이야기에 추임새 넣고 장단 맞춰주는 수다상대 정도만 있으면 된다. 가능한 나 만큼이나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면 함께하기 더 편하다. 물론 그런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결국은 서로의 등 뒤에서 칼을 꽂고 파국을 맞는다. 다른 수다 파트너를 찾아 전전하며,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도 결코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이 옳다는 것만 평생 증명하며 살아갈 뿐이다.
사랑을 못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중심 없이, 세상의 잣대에 휩쓸리는 내 병든 자존감이 문제다. 이런 열악한 현대사회라는 환경 속에서, 난무하는 거짓말과 부정적인 메시지 속에서 병든 자존감을 어떻게 치유할까?
자존감의 치유는 자신을 수용하는 데서 시작된다. 수용한다는 말은 고치려 들지 않는 것이며, 세상의 잣대로 분석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것이며, 있는 그대로 받아준다는 의미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게 아니라, 양념을 쳐서 맛을 변질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맛을 그대로 느끼고 삼키는 것이다.
자신을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은 배우자를 수용할 수 있고, 그런 부모는 자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수용할 수 있고, 그런 사람은 타인도 수용할 수 있는 내공이 생긴다. 타인을 조건 없이 존중할 수 있고 주변사람과 건강한 관계를 맺어갈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어떤 업적, 기록을 이룬 사람보다, 수용을 이룬 사람, 무너졌던 자존감을 회복하고, 자신과 타인을 사랑할 줄 알게 된 사람, 약자를 존중할 수 있게 된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수용하는 모습이야 말로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고, 내 주변에 두고 싶은 모습이며, 사람에게 만족과 행복감을 가져다 주는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수용이 이루어지는 집이 좋은 집안이며, 수용하는 사회가 유토피아다. 나와 주변 사람, 대대로 후손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행복의 바탕을 이루는 것보다 훌륭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자신과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다. 늘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불평불만을 일삼고 살아간다. 그런 부모로부터 수용받지 못한 자녀는 자존감에 크게 손상을 입게 되고, 자기 자신을 수용하지 못하는 불행한 어른으로 자라나, 결국 그 다음 세대를 수용하지 못하는 부모가 되며, 낮은 자존감을 대대로 물려주는 악순환의 패턴, 불행한 인생이 끊임없이 이어지게 된다.
당신이 현재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잠시 멈추어 서서, 당신이 자신에 대해 (혹은 주변 사람 및 환경에 대해) 무엇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당신의 행복을 위해, 당신이 수용하지 못했던 그 대상을 있는 모습 그대로 감싸 안을 수 있기 바란다. ‘너는 그것보다 더 가질 수 있었어. 저것 대신 다른 것을 선택했어야 했어’라고 세상이 귀에 불어 넣는 부정적인 말들, 거짓말들을 차단하라. 이게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기준으로 제시하는 모든 세상의 허상들을 내 머릿 속에서 지우라. 당신이 현재 가진 것이 최선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기 바란다.
어린 시절 부모나 양육자로부터 수용과 존중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자라, 자존감이 병든 정도가 심각한 상태라고 느껴지면, 이런 일기를 써 볼 것을 권한다. 이 일기의 이름은 <나를 키우는 일기>이다. 먼저 자신의 감정, 생각, 마음을 있는 그대로 글로 쏟아내라(파트 1). 그리고 내가 나 자신의 부모가 된 것처럼, 나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코멘트를 그 아래에 달아주라(파트 2). 아래의 예를 참고하라.
파트 1: 그 사람이 인사도 안 하고 모른척 지나갔을 때 내 마음이 모욕감에 무척 괴로웠어.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하고 무시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파트 2: 그랬구나. 많이 속상했지. 그런 일을 당하면 정말 기분이 나빠. 그렇게 느낄만 해. 하지만 말야, 네가 괴로워 할 필요는 없어. 사람을 보고 인사도 안 한 그 사람이 잘 못한 거지, 네가 잘 못한 건 아니잖아? 너를 무시하거나, 미워해서 그렇다고 판단 할 필요도 없어. 그 사람이 오늘 아침에 부부싸움을 했는지, 배탈이 나서 화장실이 급했는지 알 수 없는 거니까. 그 사람의 매너없는 행동 때문에 네 기분이 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난 네가 행복할 자격이 있는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해. 널 정말 사랑해.
이 일기를 1년 정도 지속적으로 쓰면 분명히 자존감이 회복되고 여러면에서 마음의 건강을 되찾을것이다. 자존감을 회복하고, 자신의 감정을 코칭하는 연습이 충분히 되고나면, 자녀의 감정을 수용하고 코칭해 주는 일도 보다 수월하게 느껴질 것이다. 자녀의 자존감을 키우는 양육 요령에 대해서는 다음 칼럼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다.
문의 giantes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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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 <메릴랜드주 ESOL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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