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옥
햇살 가득 내려앉은 베란다 의자에 앉아있다.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골목으로 먼지 같은하얀 햇살에 눈이 부시다.
햇살은 빌딩에서 빌딩으로, 나무에서 나무로 자리를 옮겨가며 멀어졌다 가까워지고, 가까워졌다 아득해지며 어떤 미망 속으로 나를끌어들인다.
어릴 적 과수원 가는 신작로도 그랬다. 먼지같이 온 세상을 떠돌아 다니는 햇살은 유독 은사시나무에만 매달려 반짝반짝 빛나고,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온통 하얀색으로 변해버린세상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와 잠든 것인지 깨어 있는 것인지도 모를 가사 속, 나른함을 느끼고는 했었다. 그럴 때는 새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텅 빈 신작로에는 나를 따라오는 그림자뿐 발걸음을 재게 놀려 과수원엘 당도하면, 엄마는 아버지가 입다 헐렁해진 셔츠를 입고 마당 한쪽에서 " 아이고 내 새끼" 하며 반갑게 맞이하곤 하셨다.
언제 버스가 지나갔는지, 풀 위에 앉은 뽀얀먼지가 내 발자국 따라 폴폴 날리던 신작로길 미처 포장되지 않은 신작로에 무시로 굴러다니던 자갈조차도 하얗게 빛나던 그 길을 예닐곱 작은 발자국을 찍으며 끝도 없이 걸어가다 보면, 그 길 끝엔 언제나 보고 싶은 엄마가기다리고 있다는 안도감만으로도 세상이 눈부셨던 시절, 절절 끓는 햇볕에 작은 돌들이 탱글탱글 익어 가는 그 길은 늘 그리움의 시작이었다.
생일이 빠르다고 일찍 입학한 초등학교생활은 그런대로 적응하면서, 오고 가는 거리가 멀어 나는 다섯째 언니의 등을 빌리지 않고서는 등하교가 불가능했던 시절이있었다.
지금처럼 학교 버스가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다섯째 언니의 등은 그때의 나의 전용 자가용이나 마찬가지 역활을 했었다. 엄마는 시오리 과수원 길을 매일 드나들 수없어, 여름철 한창 농번기 때는 아예 과수원에서 지내는 날이 많아 며칠에 한 번씩밖에는 엄마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고 자연 나는 늘 다섯째 언니의 치마폭에 싸이게 되었다.
언니는 내 긴 머리를 땋아 리본을 매어 주기를 좋아했다. 빗도 얼기 빗 보다는 촘촘한 참빗으로 목 뒤 아래까지 난 밑머리를 바싹 추켜 예쁜 리본을 아침마다 달아 주었다. 그리고내게 많은 것들을 처음 접하게 해 준 사람 또한 다섯째 언니다. 유럽풍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동화책을 보며 아! 세상에는 나랑 다르게생긴 사람도 사는구나 했었고, 언니의 손을 잡고 따라가서 맛을 보던 양과자집 소보로빵이그랬고, 빳빳하게 풀 먹여 어깨를 부풀려 만든옥양목 꽃무늬 원피스가 그랬다. 그 시절 언니는 배꽃 같이 예뻤다.
그렇게 어여쁜 언니가 사랑을 시작할 때도거기엔 내가 있었다.
낯가림이 심했던 나는 왠지 매일 만나던 낯선 아저씨가 싫지 않았고, 한 손은 언니가 잡고, 다른 한 손은 아저씨가 잡고 그네타기에웃음을 지을 때는 늘 바쁘다는 핑계로 다감하지 않은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우려 했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눈을 피해 나를 방패로 삼은 언니의 앙큼함에 내가 제대로 방패 노릇을 했는지언니와 아저씨와의 연애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언니가 시집을 가고 얼마 후, 눈부시게 빛나던 햇살이 은사시나무 사이로 내려앉던 어느여름내 어린 발자국이 찍히던 하얀 신작로에도 검은 구름이 몰아쳤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몰아치던 비바람에 결국 안전했던 나의 유년은 곤두박질치고 행복했던 한 시절은 그만 막이 내려진다. 그러나 기억 구석구석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아름다운 길 끝에는 언제나 나를 품어 주던행복한 순간이 있음에 길을 잃지 않을 자신이생길 것이고, 그 길 위에는 한밤중 꿈처럼 나타나셨던 엄마의 기적도, 제아무리 힘든 고비사막이어도 더 이상은 언니의 등을 빌릴 수 없음도나는 알아차려야 할 일이었다.
폭풍 후의 삶은 추웠지만, 아낌없이 받아온사랑으로 세상을 향한 나의 영혼은 더욱 단단해지고 잠시 보이지 않았던 길에도 새들이 찾아 오고, 그 길은 이제 바다를 건너 하와이까지 이어져 나는 어느덧 육십의 고개를 앞에 두고 있다.
아들의 결혼식을 보러 오겠다는 언니를 마중하러 호놀룰루공항으로 나갔다.
배꽃같이 어여쁘던 언니는 이제 칠십을넘긴 할머니가 되어 내 가슴속에 꼬깃꼬깃 감추어 두었던 엄마를 생각나게 했다.
내가 맡고 있는 교회 소속 한글학교 아홉살 제니는 나를 둘째 엄마라고 불렀다. 왜 그렇게 부르느냐고 물어보면 첫 째 엄마는 집에 있는 엄마고 나는 엄마처럼 저한테 잘해주어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5박 6일의 짧은여정으로 언니는 떠나면서 "나는 이제 가슴속의 짐 하나를 여기 내려 놓고 간다 잘 살아라" 해서 기어이 울음보를 터뜨리게했던 나의 둘 째 엄마!똑같은 신작로에서 갈라 산지 40년이 지났어도 나는 여전히 언니를 따라 가고 있다.
때로는 심한 폭풍으로 끊길 것 같던 길에서 비 맞고, 눈맞고, 바람맞으며 어머니라는 이름의 길을 배우고 걸어 가고 있었던것이다.
앞 만 보고 걸을 때는 곧은 길처럼 보여도,뒤돌아 보면 길은 구불구불 휘어져 흙 속에가려 있기도 하고, 소나기를 맞아 깊이 파인흔적도 남아 있다. 예상하지 못했던 길을 걸으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신작로에서, 나도 이젠 예전에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내 아이가걸어갈 길 위에 디딤돌을 하나씩 올려 놓는나를 바라 본다.
나의 길, 혹은 여자의 길에 대한 동경에 비해 터무니없이 끈질겼던 어머니의 길.
한사코 내치려하면 한사코 따라 붙던 그 길이, 일상이 되고 삶이 되어 역사가 된 그 길에서 이제는 아들이 걸어 가고, 그 아들의 아들이 걸어 갈 신작로가 조금씩 더 곧아지고 넓어져서, 이웃을 밝히는 바른 길로, 세상 한 가운데에 우뚝 서게되기를 감히 꿈꾸어 보는 것이다.
<문예공모전 수필부문 심사평>
위 진록<소설가>
수필에는 특별한 공식이나 틀 같은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거침없이 읽히고 문장 속에 흐르는 운율의 쾌감과 함께 감동을 안겨주는 그런 글이 좋은 수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거기에는 까다로운 문장법과 기술적인 약속들이 따르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글은 곧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에게 생명이 있듯이 문장에도 생명이있다는 말이다. 문장이 살아 있느냐 아니냐가 문장 평가의 척도가 되는 것도,사람에 따라 문장이 다르다는 것도, 글은 곧 사람이라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있다. 문장이 살아 있어야 필자의 호흡과 생각과 삶의 모습이 전달되며 감동이 절로 다가오는 법이다.
당선작 고옥씨의 ‘어머니의 길’이그런 글이다. 시적 언어로 묘사되는유년시절의 환상적이며 아름다운 도입부에서 필자의 비범한 문장력이 드러난다.
극히 서정적이면서도 인상파의 음악이나 그림을 연상케 하는 문장이 신선하다. 필자와 둘째 엄마가 되어 준 언니,그리고 기적 속의 꿈처럼 나타나는 엄마, 어머니의 길 위에 서 있는 세 여인의 모습이 번갈아 떠오르면서 자연스러운 감동으로 다가 온다.
다음 ‘어머니의 실패’는 오래된 실패에 얽힌, 지금은 병석에 누워 있는 늙은어머니의 슬픈 얘기다.
짤막짤막한 문장으로 아직 실패에감겨있는 듯한 애잔한 얘기의 실마리를 담담하게 풀어 나간 가작이다.
특히 병석의 어머니와 실패와의 만남을 묘사한 마지막 몇 줄이 인상적이다.
장려상, Grace Kim의 ‘추’는 바람에날리는 풍선처럼 자유분방하면서도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 여성으로서 제자리를 잃지 않으려는 진지한 염원이 깔려있는 수필이다. 어디까지나 밝고 구김살 없는 문장에 기승전결의 화술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적이 놀라지않을 수 없었다.
끝으로 응모작 117편 중 에는 생활수기로 보이는 글들이 뜻밖에 많았다.
또 수필부문의 당선, 가작, 장려상 모두가 어머니와 관련된 얘기였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이었음을 말해 두고 싶다.
<당선 소감>
풀루메리아 꽃잎의 달콤한 향기가 다이아몬드 헤드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날이면 호놀룰루에는 언제나 실처럼 가는꽃비가 내립니다.
문득 바라보는 산언저리에 무지개라도 곱게 떠오를때면 나는 또 무작정 아름다운 무지개에 마음 한자락 닿고 싶어 오래오래 하늘을 올려다 보곤합니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아름다운 것 닿을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갖을 수 없어도 가끔씩 제머리위에서 그 모든것에 희망을 주는 무지개가 제겐 글쓰기입니다.
이제 무지개 바라보기에 용기를 더해 주신 미주한국일보사와 심사위원분께 깊은 감사를드립니다언제나 날카로운 지적으로 발전을 도모해 주는 남편과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한국에서 치매로 고생하고 계시는 아버지 같은 형부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하와이 문인들 모두 자신의 일인양 기뻐해 주시던 문우들과도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
고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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