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는 프랑스의 대문호 앙드레 모루아가 집필한 ‘미국사’(김영사 간)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앙드레 모루아는 신대륙 발견부터 초강대국 반열에 오르기까지, 500년 미국 역사의 장대한 드라마를 유려한 문체와 심오한 통찰력으로 풀어냈다. 신용석 조선일보 전 논설위원이 번역을 맡아 원작의 미문과 의미를 충실히 살려냈다는 평이다. <편집자 주>
남편의 지위는 절대적
미국인의 개인생활은 영국의 관습법이 지배했다. 이 법에 따르면 남편은 집안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쥔 주인으로 아내의 재산을 관리하고 심지어 아내에게 용돈을 주지 않을 권리까지 있었다. 소수의 미망인과 노처녀는 자기 재산을 스스로 관리했으나(조지 워싱턴과 결혼하기 전 마샤 커티스가 그러했다) 이런 일은 극히 예외적이었다.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 제3대 대통령)은 파리에 체류할 때 프랑스의 부인들이 혼자 고관을 방문하는 것을 보고 몹시 놀라며 말했다.
“부인이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활동하려 하지 않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다. 아메리카에서 젊고 건강한 부인은 남편을 받드는 일, 아이들을 애정으로 보살피는 일, 집안일과 정원 관리로 하루를 보낸다.”
VA, MD 이혼 거의 없어
당시 여성들은 일찍 결혼했고 출산으로 사망하는 일이 많았다. 아내가 죽으면 남편은 대개 재혼을 했다. 혼자서 집안일까지 해결하는 것도 어렵고 성적 욕구를 아무렇게나 발산해 죄를 짓는 것도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남부에서는 흑인 미녀가 농장주의 탐욕 대상이었다. 백인여자 하인의 경우 실수를 하면 고용기간이 1년 연장되었다.
버지니아나 메릴랜드에서는 이혼이 거의 없었다. 가톨릭과 감독교회에서는 이혼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성서에 기초를 둔 법률을 시행하는 코네티컷과 매사추세츠에서는 이혼을 허용했다. 퀘이커교도 사이에서 결혼은 증인 앞에서 정절을 약속하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식민시대 초기에는 아버지가 자녀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했으나 자녀들이 쉽게 토지와 직업을 얻게 되면서 그 권한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남부의 무도회
한편 농촌의 생활이 단조로워서 그런지 목사들이 강하게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장례를 핑계 삼아 대규모로 잔치를 치르는 습관이 남아 있었다.
남부의 사교생활은 매우 화려했고 대저택에서는 자주 무도회가 열렸다. 근방의 농장주들은 말이나 4륜마차를 타고 모여들어 지그(Jig: 빠르고 경쾌한 춤) 혹은 릴(reel: 스코틀랜드 고지 사람들의 경쾌한 춤) 같은 새로운 춤과 시골 춤을 즐겼다.
1674년에는 양복점 주인과 조수가 자기들의 말로 경마를 했다가 ‘경마는 신사만 할 수 있는 스포츠’라고 해서 벌금을 내기도 했다. 버지니아에는 이미 18세기에 경마클럽이 있었다.
유럽도 그랬지만 시골에 장이 서면 온갖 구경거리가 모여들었다. 클럽, 바 그리고 가정에는 여러 가지 음료가 있었다. 대개는 브랜디, 여러 과실로 빚은 럼주, 맥주, 사이다 등이었다. 카드놀이도 크게 유행했다.
담배와 여우사냥
사람들은 오랫동안 담배를 파이프로 피웠다. 1762년 이스라엘 퍼트넘 장군이 쿠바에서 귀국했을 때 시가를 소개했는데 아메리카에서 직접 만든 것은 1800년 이후였다. 버지니아와 뉴욕 근방에서는 돈 많은 사람들이 영국에서 여우를 수입해 말을 타고 즐기는 여우사냥을 시작했다.
음악에 대한 취미도 다양해져 찰스턴에서는 성세실리아협회가 음악회를 개최하는 한편, 프랑스에서 음악가를 초빙하기도 했다. 매사추세츠에서는 청교도주의의 압력이 약해지면서 극장을 개설했으나 필라델피아에서는 퀘이커교도들의 반대로 1754년까지 허가가 나지 않았다.
생활의 중심은 여전히 가정과 가족이었다. 집의 내부 장식은 영국식 또는 네덜란드식을 따랐으나 그리 정교하지 못했다. 벽은 널빤지와 색 벽지로 간단하게 만들었고 창은 작은 유리창이었다. 난로 둘레의 타일 장식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대개는 성서에서 선별한 그림들이었다. 책상 한가운데에는 가족용 성서를 놓았고 벽에는 가족의 초상화를 걸었다.
자녀교육
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특히 남부에서는 통학거리가 멀다는 점이 교육적 성과를 올리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녀 교육을 스스로 맡을 수 없음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어떤 지방에서는 철자법을 잊거나 때로는 쓰는 것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매사추세츠의 청교도들은 자녀에게 성서를 읽혀야 했으므로 교육을 등한시할 수가 없었다. 1635년 타운미팅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보스턴 라틴 스쿨(초급학교)을 설립했다. 1642년 매사추세츠에서는 자녀에게 글을 가르치는 책임을 부모에게 부과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1647년에는 50가구가 사는 마을에는 초급학교를, 100가구 이상 마을에는 초등중학교(Grammar School), 즉 단과대학(College)으로 진학할 준비를 하는 중학교를 설립하라는 법령을 제정했다. 이 법령이 잘 지켜진 것은 아니지만 초등중학교 수는 점점 늘어났다.
남부는 영국의 교육제도를 따랐다. 가난한 아이들은 초등학교에서 배웠고 부유한 아이들은 가정교사에게 배운 뒤 단과대학을 마치거나 영국의 대학교로 진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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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석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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