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을 찾아 헤메고 또 헤메었네 (I have traveled all over this country)”로 시작되는 컨트리 송 <퓨짓 사운드Puget Sound> 가사를 내가 처음 읽은 것은 시애틀 해변가의 어느 조그만 식당에서 였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무심코 테이블 위에 깔린 종이 식탁보를 보았는데 거기에 익살스럽게 보이는 어떤 노다지 꾼의 삽화와 함께 그 노래 가사가 적혀있었던 것이다.
가사 내용은 골드 러쉬(Gold Rush) 때 어느 노다지 꾼이 금을 찾아 흘러 흘러 퓨짓 사운드라는 곳까지 왔는데, 거기서 그토록 찾기를 원하던 금은 못 찾고 대신 해안 주변에 널려진 엄청난 조개를 발견해서 행복해 하는 내용이었다. “주변에 널려진 엄청 많은 조개들, 난 이제 이 행복만 생각할 거야! 주변에 널려진 엄청 많은 이 조개들.”
내가 처형네가 사는 시애틀에 갔을 때는 내 자신 참으로 답답하고 우울한 형편에 있었다. 문교부 정규유학생 자격 시험을 거쳐 유수한 명문대학에 입학허가를 받아 미국에 왔지만 학위는 멀고 길은 험난했다. 장학금은 물론 없었고 한국에 있는 집 도움을 받을 형편도 안돼 다른 유학생들처럼 별의별 궂은 파트타임 일을 다하면서 학업에 매달렸다. 덕분에 남들 2년이면 한다는 석사학위를 나는 3년 반이나 걸려서 했고, 남들 3년이면 끝낸다는 박사과정을 나는 5년 하고도 절반을 했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준비하는 기간중에는 약간의 시간 여유가 있어서 주위에서 돈을 빌려 아내가 맡아서 할 조그만 가게를 운영했는데 그것도 3년 만에 완전히 거덜을 냈다. 돈을 벌기는 커녕 빚은 빚대로 지고, 가게에 몰두하느라고 박사 논문 시기를 놓친 것이다.
금을 포기하고 보따리 하나 작대기에 달랑 매달고 <퓨진 사운드>라는 곳으로 떠나는 가사 속의 노다지 꾼처럼 나 역시 어느날 책상과 책장을 정리하며 새출발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이놈의 박사 안한다!” 그리고 “우선 밥벌이 할 직장을 구하자!” 이렇게 기대치를 낮추어 맘을 먹으니 또 새로운 세상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건 또 쉽나? 구직 이력서를 보낸 곳이 한 50 군데는 되었을 것이다. 주유소 야간 캐쉬어로 부터 청소부 무역회사 직원 등 청탁불문(淸濁不問) 원근불문(遠近不問) 훌타임 잡(Full Time Job)이라면 눈에 보이는 대로, 손이 닿는 대로 문을 두들겼으나 그러나 모두 Over Qualify 라는 듣기 좋은 말로 딱지를 맞았다. 대학 선생, 컴퓨터 Director 자리는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에 응모해 달라는 말로 거절을 당했다. “남들은 금광을 찾아 부자가 되었다는데/나만 요모양 요꼴/ 쭈그러진 양재기에 무디어진 곡괭이” 노래 가사처럼 나 역시 오도 가도 못할 처량한 신세가 된 것이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어느날 아내는 시애틀에 사는 언니집에게 다녀오자고 했다. LA 에서 시애틀까지 고물차를 운전해서 아내와 아들 딸 이렇게 네 식구가 미국 생활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장거리 여행을 했다. 태평양을 바라보고 달리는 퍼시픽 코스트(Pacific Coast) 1번 도로가 그렇게 오묘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학위공부 굴레에서 벗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세상이 그렇게 멋져 보이는 것이 신기했다. “에헤야 가다가 가다 못가면, 데헤라 쉬어나 가세” 가다가 쉬고 쉬다가 가고, 한가롭게 운전을 해서 시애틀 처형 댁에 가서 며칠을 지내고 왔다.
50군데 이력서를 보낸 곳 중에서 3군데에서 연락이 와서 인터뷰를 했는데 그 중 취직이 된곳이 대한통운. 그때까지 나는 영주권이 없이 F-1 비자의 유학생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신통하게도 대한통운만 영주권 보자는 말을 안했기 때문이다.
대한통운이 원래 무척 보수적인 회사이지만 반면에 동아건설의 동아그룹 계열사답게 ‘노가다’ 기질도 다분히 있어서 영업만 잘해서 돈만 많이 벌어오면 본사직원이건 현지직원이건 구분없이 진급시키고 대우를 잘 해 주었다.
나는 1983년 말단 현지직원으로 입사를 했지만 영업 성적이 ‘기적적으로’ 좋아서 4개월 만에 과장대리 발령을 받고, 그후로 2달후에 과장이 되고 1년만에 차장, 그 다음해에 부장, 그리고 LA 지점장, 다음에 샌프란시스코 지점장으로 전근되어 직급은 ‘이사’로 퇴직을 하였다. 퇴직후 물론 운송회사를 차려서 ‘사장님’도 되어 보았다.
“에헤야 가다가 못가면, 데헤라 쉬어나 가세” 세상살이 무언가 잘 안풀린다 싶을 땐 거기에 짓눌리지 말고 쉬어가기도 하면서 시선을 달리하여 세상을 바라볼 것이다. 몇십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시애틀의 어느 식당에서 얻어 온 그 <퓨짓 사운드> 가사 종이 식탁보를 가끔 꺼내 읽는다. “주변에 널려진 엄청 많은 조개, 이제 난 이 행복만 생각할 거야”
하나님이 나에게 예비하셨던 축복의 엘도라도가 ‘황금이 쏟아지는 부(富)나 시끌벅적한 세상의 출세가 아니고 바로 이런 류(類)의 잔잔한 행복이었구나’ 깊이 깨닫는다. 황금 대신 조개 밭 엘도라도면 또 어떠랴! 나는 이렇게 유유자적(悠悠自適) 노후를 보내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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